부처님 전생으로의 숭고한 초대, 보협인석탑 야사(野史)속으로

 

편집자주
 
1963년에 세워져 올해로 48주년을 맞은 우리대학 박물관은 대학박물관 사이에서도 수많은 불교미술관련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종류, 시대를 막론하고 다양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이 아직 박물관의 위치조차도 모르는 실정이다. 이번 문화면에서는 우리대학 박물관의 수많은 유물 중 국보 209호로 꼽히는 ‘보협인석탑’의 뒷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기단(基壇)부분, 탑에 새겨진 본생담(本生譚)이야기등, 평범해 보이는 돌탑이 전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키는 나보다 약간 컸다. 우리대학 박물관의 중앙에서 반짝이는 화강암 재질의 돌이 묵묵히 우직하게도 섰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돌탑은 언뜻 보면 ‘대체 왜 국보가 되었을까?’라는 의문점도 든다.

그러나 가만히 돌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됨과 동시에 앞의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다. 조용히 지나치기엔 이 돌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너무나도 재밌다. 지금부터 돌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자. 돌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하게 고이 묵혀 둔 역사의 실타래를 여러분에게 풀어 내보일 것이다.

국보로 지정된 우리나라 유일무이의 보협인석탑

이 평범해 보이는 돌은 보협인석탑 우리대학이 소장한 두 개의 국보 중 하나다. 이 탑은 높이가 약 1.9m도 되지 않아 석등(石燈)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작은 크기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유일한 석조보협인탑으로 특이한 형태를 지녀 연구가치가 매우 높은 문화재다.

유일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본생담(부처님 전생 설화)을 조각한 탑으로 알려져있다. 인도의 산치대탑, 바르후트탑, 중국의 둔황석굴에서는 본생담을 주제로한 작품이 많으나 우리나라에서 본생담을 주제로 한 작품은 보협인석탑이 유일하다. 이러한 요인이 모여 보협인석탑의 연구가치를 높여주고 있으나 아직 보협인석탑에 대한 연구가 미진해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석탑에 새겨진 부처님의 전생

앞에서 얘기했듯, 보협인석탑에는 부처님의 본생담이 새겨져 있다. 본생담이란 부처님이 고타마 싯달타로서 탄생하기 이전 500번의 전생이야기를 뜻한다. 부조(浮彫)로 표현돼 잘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치기 쉬울 수도 있지만 탑 앞에 가만히 서, 밑에서 세 번째 돌과 맨 꼭대기 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재미난 본생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세월이 흘러 형상이 뚜렷하진 않지만 나무 아래에서 오른손에 턱을 괴고 반가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보살상, 두 다리를 펴고 바닥에 앉아 무언가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몽고식 복장을 한 보살상, 두 마리 사자로 보이는 짐승에게 자신의 몸을 희생물로 바치는 모습, 마지막으로 본생도의 마지막이자 부처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까지 탑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다리의 부자재로 사라질 뻔한 기단부분

그렇다면 과연 보협인석탑은 어떻게 우리대학 박물관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 긴 역사는 이러하다. 중국의 충의왕은 인도 아소카왕이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8만 4000기의 탑에 나누어 봉안했다는 이야기를 토대로 금, 동, 철 등을 재료로 소탑 8만 4천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安置)했다. 8만 4000기의 탑 중유일하게 한 개의 탑만이 천안시 북면의 대평리 탑골계곡의 고려시대 절터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작고한 미술사학의 태두(泰斗) 황수영 총장이 박물관장 재임시절(1968년) 절터에서 발견해 옮겨왔으나 그 때는 지금과는 달리 기단 부분의 빠진 상태였다. 이후 절터 조사 중 다리 디딤돌로 사용되고 있던 기단부분을 이기선(미술72졸)연구원이 발견해 옮겨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국보가 다리의 부자재로 사라질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지금이야 문화재를 발견하면 문화재청에 신고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지만 당시에는 별다른 법령이 없었기 때문에 개인이 발굴하면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었다. 결국 수많은 연구원들의 노력으로 인해 지금의 보협인석탑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돌이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지 몰랐을 것이다. 운 좋게도 보협인석탑 조각의 퍼즐을 완성할 수 있었다”며 이기선 연구원은 당시를 떠올렸다.

박물관은 살아있다

이뿐만 아니다. 우리대학 박물관 속에는 수많은 재미난 유물들이 숨겨져 있다. 가끔 문화재 애호가들이 한 작품에서 몇 시간이고 서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들은 유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유물 속에서 당시 시대상황을 떠올리고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찾아낸다.

이처럼 박물관은 살아있다. 역사의 파노라마가 몇 십 평 남짓한 공간에 담겨있는 것이다. 비록 건물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거나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진 않지만 그 속에선 유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여러분과 대화하기를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의 기운이 시나브로 스며드는 지금, 불어오는 봄바람과 함께 수천 년 전 역사 속을 여행하는 시간여행자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