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치하에서도 빛난 동국 연극

편집자주
우리대학 ‘연극학과’는 우리나라의 연극과 영화를 대표하는 전통의 명문학과로 우뚝 섰다. 한석규, 최민식, 고현정, 전지현, 박신양, 김혜수, 이정재, 정세호, 정을영 PD, 양윤호 영화감독 등 우리대학 출신 예술인은 1,000여 명에 이르며, ‘동국예술인 모임’(회장=이덕화)은 학교발전기금을 조성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 연극학과는 ‘영화영상학과’ ‘연극학과’로 나뉘어져 있고, 연극학과 내에 뮤지컬 전공도 있어 최고의 교수진과 함께 우리나라 예술계를 끌고 갈 인재를 양성중이다. 이번호부터는 80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대학 연극학과의 전통을 살펴본다.

 

 동국대학교 영화·연극의 역사는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와 혜화전문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1928년 5월 28일 불교전수학교에서 불전교우회 창립총회가 있었다.

초대학예부장으로는 윤태동, 간사에 주동훈, 강유문, 한상훈이 맡게 되었으며 같은 해 ‘일광’지를 창간, 문예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엔 이렇다 할 특별한 활동이 없었다. 그러다 1930년 4월 7일 불교전수학교가 중앙불교전문학교(이하 중전)로 승격되면서 6월 4일 학생연합회인 ‘북악회’가 창립되면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이 때 학예부는 강유문, 한성훈에 의해 같은 해 6월 27일 중전 최초의 음악회를 갖고 제1회 학생웅변대회에 참가했으며 1931년 1월 성도절 기념 연극까지 계획하게된다. 그 첫 작품이 김소하의 작품인 ‘지옥화’이다. 이 작품은 목련경에서 소재를 가져온 작품으로 당시 전국에서 많이 상연되기도 했었다. ‘목련소인극’으로 양주 보광사에서 1929년 상연되었고, ‘목련극’으로 개명해 통도사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었다.

이를 계기로 북악회는 매년 정월 성도절과 5월 부처님오신날은 늘 연극상연을 하게 된다. 강유문의 ‘꿈’, 김용학의 ‘법화’,‘업보, 백우(홍사용)의 ’흰젓‘과 같은 불교 포교수단 겸 취미활동으로 불교소재의 작품을 상연하게 된다.

이러다 1933년부터는 번역극에 현대극까지 세력을 확장해나가기 시작했다. 싱클레이의 ‘이층의 사나이’, 송영의 ‘일체면회를거절하다’, 마이켈 콜드의 ‘돈’, 이무영의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등이 그 예다.

중전초기시절부터는 강유문, 김용학, 이태성, 한동원, 이태우, 현수길, 손상현 백만기, 정용식 등이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이외에도 김태흡은 ‘불교’지를 통해 논문과 희곡을 남긴 최초의 희곡작가이다. 그는 ‘불교’지에 ‘누구든지’,‘불타의 감화’,‘불타의 홍원’ 등을 발표했다.

또 이태우는 1937년 재학 중 조선일보에 평론이 신춘에 당선되었고 문학평론을 쓰다가 영화평론으로 방향을 바꾸어 활동하다 해방 전 만주로 가 만주 국영영화공사에 들어가 기획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남북의 교류가 단절돼 그 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김준호는 졸업직후 경성방송국 방송부에서 프로듀서로서 활동을 한 동대 최초의 방송인이다. 그러나 해방 후 의학에 관심을 기울여 의사자격시험에 패스, 병원을 개원하였다.손상현, 백만기, 오화룡 등은 졸업 후에도 극단 고협단원이 되어 활동을 했고 오화룡은,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백조'동인을 겸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후 행방이 묘연하다.

조동탁(지훈)은 혜화전문학교 출신으로 ‘한 낮에 꿈꾸는 사람들’에 백만기, 손상현과 함께 출연한 후연극에 남달리 관심을 가져 해방 후 고대 극예술연구회 지도교수를 맡았으며 매 공연마다 월급까지 제작에 보태는 열정을 보여 고대극예술연구회의 발전에 이바지 했다.

소설가 조정래의 부친 조종현도 재학 시절 시조 등을 집필하였고 노래극에 관심을 가져 ‘꽃피는 동산’등을 써 ‘불교’지에 게재키도 했다.

최금동은 백만기, 오화룡, 손상현등과 함께 개성 지족암 설화인, ‘십년공부 나무다미타불’을 무용극화하여 주목을 끌었다. 그는 1936년 동아일보가 당시 거금 300환의 현상을 걸고 공모한 시나리오에 ‘애련송’이 당선되어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 1938년 매일신보에는 영화소설 ‘향수’를 연재한 것이 인연이 되어 입사시험에 단독 채용되었고 ‘향수’는 후에 ‘길은멀어도’란 이름으로 영화화됐다. 다음 ‘해빙기’,‘새로운 맹세’,‘산유화’,‘오 내고향’,‘청춘극장’,‘비극은 없다’,‘가는 봄 오는 봄’,‘이름없는 별들’등 수십 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 밖에 1944년 졸업생인 배준호와 1939년 극계에 입문한 정민(동민)이 있다. 배준호는 강원도 태생으로 김준호에 이어 두 번째 방송인이 되었는데 해방되던 해 경성방송국 편성과에 근무하다 1949년과 1954년 두 차례 해외 방송계 시찰을 했다. 해방 후 KBS에 근무하다 MBC 개국 시 자리를 옮겨 방송부장을 지냈고 TBC가 개국하자 그곳에 기획위원으로 이직, 계속 방송계 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배우 정민(동민)은 애당초 승려였으나 처음 이광래에 의해 1937년 발탁되어 활동하면서 영화에 출연했다. 그는 현대극장, 청춘극장 등에서 활동하였는데 연극은 ‘지옥과 인생’이 데뷔작이며 영화는 ‘사도세자’가 데뷔작이다. 그는 숱한 연극과 영화에 출연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1960년대 말 TBC-TV 김재형이 연출한 ‘오늘은 왕’으로 데뷔 MBC, KBS TV까지 전전하면서 브라운관을 탔다. 결국 그는 1978년 활동을 접고 승려가 되어 샌프란시스코로 이민, 사찰을 짓고 생활하다 1980년대 말 입적했다.

이렇듯 동대연극 초창기인 1931년 중앙불전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인 혜화전문까지는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였기에 연극은 불교포교나 축제일환, 그리고 암암리에 민족 단합운동을 겸하던 시기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46년 혜화전문학교는 군정청의 대학령에 의해 동국대학으로 개편되었다. 따라서 연극도 새로운 도약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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