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한국) 佛敎學會(불교학회) 제1회 佛敎學發表會(불교학발표회)에서

韓國(한국) 佛敎學會(불교학회) (會長(회장)ㆍ홍정식佛大敎授(불대교수))가 學會(학회)창립 후 처음으로 개최한 第(제)1回(회) 全國佛敎學述發表會(전국불교학술발표회)가 지난 9, 10日(일) 양일間(간)에 걸쳐 학생회관 회의실에서 열렸다. 同大會(동대회)에서는 本校(본교)에서 元義範敎授(원의범교수)를 비롯한 3名(명)이 論文(논문)을 發表(발표)하는 외에 各大學佛敎學者(각대학불교학자)들의 논문 10여 편이 발표되었다. 그 中(중)에서 佛大(불대) 원의범敎授(교수)와 서울大李楠永敎授(대이남영교수)의 論文要旨(논문요지)를 발췌, 게재한다. <편집자>

  ‘불’입니다 ‘火(화)’를 생각하시나요. ‘弗(불)’을 생각하시나요. ‘不(불)’을 생각하시나요. ‘拂(불)’을 생각하시나요. ‘불’이라는 소리로 읽히우는 漢字(한자)를 모두 다생각하시나요. 그 가운데서 ‘佛(불)’도 생각하시나요. 혹시 ‘불’일 ‘물’의 미스프린트일런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하필 ‘물’의 미스프린트일수만 있겠습니까. ‘불’만을 제외한 다른 모든 하나하나의 그 무엇의 미스프린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는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오직 나 혼자만이 누릴 수 있는 思惟(사유)의 自由(자유)입니다. 물론 思惟(사유)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자살의 自由(자유)가 있듯이 ‘불’을 보지도 읽지도 만지지도 말고 新問紙(신문지)를 꾸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던지, 호주머니에 넣어버리든지 해서 ‘불’을 아예 없애 버리셔도 되지 않습니까. 곧 ‘불’의 思惟(사유)의 中止(중지)입니다. 전혀 나 혼자만의 自由(자유)입니다. 당신과 함께만이 아니라, 나 혼자만의 할 수 있는 생각까지도 얼마든지 무한히 생각하시든 말든 입니다. ‘學(학)’을 벗어나는 自由(자유)이고 信仰(신앙)의 自由(자유)입니다. ‘學(학)’을 벗어나는 學(학)이야말로 ‘學(학)’이 아닐까요.

  죽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자살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죽을 줄을 알면서도 살려고 죽을 때까지 애쓰는 사람이 거의 다지요. 싯드하르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이 ‘生(생)’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었다. 肉體(육체)는 없어지고 영혼만이 남아서 얻는 永生(영생)이 아니고 현재의 肉體(육체)대로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는 그런 永生(영생)을 바랬었다. 한번만이라도 죽으면 그 한번 죽는 죽음 바로 그것이 죽음이고 그 한번 죽는 죽음 그것이 없어야 비로소 永生(영생)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죽지 않는 方法(방법)을 발견하고 실천하여 죽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죽지 않는 方法(방법)을 이미 발견하였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神(신)에게 빌면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서 天國(천국)에 난다고 하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한번만은 죽어야만 했다. 착한 짓만을 하면 죽어서 天國(천국)에 난다고도 하였다. 역시 한번만은 죽어야만 했다. 싯드하르타에게는 그 한번 죽는 죽음이 싫었다. 그 한번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꿈도 없이 깊은 잠에 든 듯이 또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듯이 눈을 뜨고도 감은 듯이, 귀도 먹은 듯이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없이 가만 앉아있으면 죽음이라는 생각도 없어지고 죽음을 느끼지도 못한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상태는 잠깐 동안씩 있을 수 있을 뿐, 그런 상태로 日常生活(일상생활)을 하며 일생 동안을 살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 수 있을까, 과연 죽지 않을 수 있기는 있는가, 願(원)한다고 다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지는 해를 멈출 수 없듯이 죽음도 면할 수 없지 않을까. 지는 해를 멈추려는 생각부터가 잘못되었듯이 죽지 않으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 아닌가 싯드하르타는 생각을 돌렸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을 成就(성취)하는 방법의 發見(발견)보다도 죽지 않으려는 생각 그 자체를 批判(비판)하는 데로 돌아섰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 그 자체의 근거를 따졌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은 지금은 살아 있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은 살아 있다는 생각은 또 무엇에 근거하고 있을까.

  ‘지금은 살아 있다는 생각’ (이하 生(생)으로 略稱(약칭)함)은 그 前提的(전제적) 根據(근거)로서 無限數(무한수)에 해당되는 ‘日常的(일상적)이고 經驗的(경험적)인 因果連鎖的(인과연쇄적) 事物(사물)이나 事件(사건)’ (이하 事象(사상)으로 略稱(약칭)함)들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生(생)의 前提的(전제적) 근거로서의 事象(사상)들이 아무리 無限(무한)히 많아도 그것들이 그렇게 있다는 생각이 없으면 그것들은 生(생)의 전제적 근거로서의 事象(사상)들이 무한히 있다는 그 ‘있다’는 생각은 存在(존재)의 肯定(긍정) 바로 그것이었다. 存在(존재)의 肯定(긍정)에는 근거가 없었다. 존재의 긍정은 무조건적이었다. 무조건적 긍정은 獨斷(독단)이다. 生(생)이나 죽지 않으려는 생각뿐만이 아니라 생각된 모든 것은 모두 이 ‘있다’는 獨斷(독단) (이하 有(유)로 略稱(약칭)함)에 근거하고 있었다. 말이 생각의 表現(표현)이라면 ‘有’는 印歐語系(인구어계)에서의 be動詞(동사)이고 우리말에서의 ‘이다’와 ‘아니다’에서의 ‘다’이다. ‘be’와 ‘다’ 없이는 긍정도 否定(부정)도 못한다. 命題(명제) ‘p’는 ‘p is p’이고 ‘~p’는 ‘~p is ~p’이다. 命題(명제) ‘p’나 ‘~p’에 ‘is’가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함은 마치 ‘2+2□4’와 ‘2+2=4’가 같다는 생각이 잘못인거나 마찬가지로 잘못된 생각이다.
  어떠한 電子計算機(전자계산기)도 試驗官(시험관)도 ‘2+2□4’와 ‘2+2=4’를 둘 다 ‘Truth’라고 계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命題(명제) ‘p’에 ‘is’가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함은 그야 말로 ‘false simplicity’이다. 命題(명제) ‘p’와 ‘~p’에서 科學(과학)의 王(왕)인 數學的論理(수학적논리)가 시작된다면 科學(과학)은 獨斷(독단)된 ‘is’와 ‘=’의 支配(지배)를 받고 있다. ‘is는’ ‘What is this?’라는 問(문)에도 ‘This is ~ (무엇이다)’라는 答(답)에도 들어있고 산수에도 대수에도 함수에도 해석기하에도 -정수도 +정수도 0도 아닌 ‘=’이 들어 있다. 그런데 ‘is’와 ‘=’은 獨斷(독단)이다. 獨斷(독단)은 무지이다. ‘싯드하르타’가 그 十二緣起(십이연기)의 추리에서 발견한 ‘生(생)’과 ‘老死(노사)’와 ‘有(유)’의 근거로서의 ‘無明(무명)’은 바로 이러한 원리적 독단이라는 발견이었다. 그는 ‘生(생)’을 獨斷(독단)과 無知(무지)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었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의 근거를 알기위하여서였다. 獨斷(독단)하지 말아야했다. 無知(무지)를 제거해야 했다. ‘有(유)’를 없애야 했다. 그는 ‘is’와 ‘=’에 근거한 죽지 않으려는 생각에 관한 어떠한 問(문)도 答(답)도 하지 않음에 의하여 죽지 않으려는 생각에 관한 모든 問(문)은 해소되어 버렸다. ‘is’와 ‘=’를 없앰은 곧 思惟(사유)의 중지였다. 思惟(사유)의 中止(중지)는 곧 앎의 중지였다. 獨斷(독단)을 버리고 無知(무지)에서 벗어남은 바로 앎을 버림이었다. 알기 위하여 앎을 버리는 방법은 認識方法論上(인식방법론상)에서의 ‘코페르니커스’적 革命的(혁명적) 방법이었고 그 實踐(실천)은 ‘코롬브스’적 冒險(모험)이었다. 그는 앎을 버렸다. 獨斷(독단)된 ‘is’와 ‘=’로 얽어진 생각된 ‘有(유)’의 덩어리에서 벗어  났다. 그에게는 죽지 않으려는 생각에 관한 모든 問(문)도 答(답)도 ‘生(생)’도 ‘有(유)’도 이제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몸으로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싯드하르타가 그 한 번의 죽음도 죽지 않고 바로 그 몸으로 얻는 不死(불사)이며 永生(영생)이다.

  問(문)에 答(답)을 주지 않고 問(문) 그 자체의 근거를 따져서 問(문)을 解消(해소)(Erloeschen)시키는 방법, 알기위하여 앎을 버리는 方法(방법),이것이 곧 싯드하르타가 발견하고 실천하여 佛陀(불타)가 된 ‘辨證的破棄法(변증적파기법)(Dialektisches Erloeschen)’이다. 佛陀(불타)는 안 사람이 아니고 된 사람이다.
  持戒(지계), 念佛(염불), 參禪(참선)은 앎을 버리는 실천적 방법들이다. 변증적 파기법을 現象的(현상적) 問題(문제)에 적용하면 현상의 因(인)을 찾는 緣起法(연기법)이 가능하고 연기법의 否定的(부정적) 방향에서 無常(무상)과 無我(무아)가 가능하고 肯定的(긍정적) 方向(방향)에서 因緣生起說(인연생기설)이 가능하고 또 그 法(법)을 本體論的(본체론적) 문제에 적용할 때 實在的(실재적) 有(유)를 부정하는 一切皆空說(일체개공설)과 萬法唯識說(만법유식설)이 가능하다. 또 그 법을 倫理問題(윤리문제)에 적용할 때 無我說(무아설)에 근거한 滅私奉公(멸사봉공)하는 大乘的(대승적) 利他說(이타설)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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