讀書特輯(독서특집) 冊(책)속에서 自由(자유)를

  敎養書(교양서)의 讀書(독서)에 있어서 그 중요성을 말할 때에 文學書(문학서)는 構想力(구상력)을 키워주고, 또 哲學書(철학서)는 推理力(추리력)을 키워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추상적인 一般論(일반론)이기도 하려니와, 책을 읽을 때 構想力(구상력)을 또는 推理力(추리력)을 키우기 위해 읽는다고 하는 式(식)의 實利的(실리적)인 計算(계산)을 앞세운다고 하면 책 읽는 기쁨을 잃어버리게 된다. 읽고 싶어 읽는다는, 읽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는 것이 책 읽는 사람의 심정이 아닐까? 책 읽는 사람이 너무 實利(실리)를 따지는 것도 이상하지만, 大學(대학)에서 敎育(교육)을 하는데도 당장 써 먹을 수 있는 實用主義的(실용주의적)인 것만을 강조하게 되므로 자연히 책 읽는 범위도 그러한 방향으로 축소되는 경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갖춘 사람만을 요구하는 것은 大學(대학)교육에서 너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라고 본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이란 그만큼 수명도 짧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이본의 慶應大學(경응대학)에 工科大學(공과대학)이 처음 창설되었을 때에 實業家(실업가)들은 입을 모아 요청하길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 달라고 했다. 이에 대해 당시 工大學長(공대학장)인 谷村豊太郞(곡촌풍태랑)박사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은 당장 써먹지 못하게 되는 인간이라고 응수하면서 基本理論(기본이론)을 충실히 가르치기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좀 더 폭넓고 원대한 안목에서 생각해야할 일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나는 스스로의 體驗(체험)을 말하고 싶다. 독서론은 세상에 수없이 많이 있고 그중에는 참으로 뛰어난 것이 많으니 독서의 일반론을 감히 말할 것은 없을 것이다. 어떤 著者(저자)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少年(소년)이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는 걱과 같다. 中學(중학)시절에 ‘하이네’를 읽었을 때에 감전된 듯 심취해 버렸었다. 그의 서사시는 연애 시 못지않게 어린가슴에 충격을 주었다. 그의 詩(시) ‘傾向(경향)’에서
  ‘독일의 가수여, 노래하라 찬양하라
  독일의 自由(자유)를,
  너의 노래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말세이유’의 찬가의 곡으로
  우리들을 실행으로 옮기게 하라.’ 라는 구절은 지금도 당시의 감격을 살려준다. 어느 저자에게 반해 버리면 그가 쓴 것은 무엇이고 읽고 싶고 또 그가 생존하던 시대에 대해 알고 싶게 되고 나아가서 그에게 영향을 미친 선배나 그에게 영향을 받은 저자들까지 읽게 된다. 아직도 나는 한국에서 ‘하이네’全集(전집)이 나오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교양서를 읽는다고 할 때에 그야말로 어느 책이 자기의 무슨 면에서 교양으로 필요하다는 實利的(실리적)인 계산에서 읽었던 적은 없다. 읽고 싶어서 읽는다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까? 이와 같이 읽고 싶어서 읽으면 남이 시키지 않더라도 읽은 것 중에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노트’를 하게 되고 또 자기 나름의 저자나 저자가 다룬 문제에 대해서 글을 써보게 된다.
  한편 자기 학문에 관한 專攻(전공)(또는 專門(전문)의 書籍(서적)을 읽을 때에는 계통을 세워서 읽되, 카드를 작성하거나, 적어도 메모정도는 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나의 경험으로는 專門書(전문서)에 친해진 경우도 사전에 계획된 예정에 따라서 책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어느 저자에게 심취해 버린데서 발단이 되었다. 大學在學時(대학재학시)에 루소의 저서 ‘人間不平等起源論(인간불평등기원론)’을 우연히 보고는 크게 감격되어 루소에 관한 것은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고, 그것이 끝나자 루소와 同時代人(동시대인)인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 돌박, 꽁디약…등에 손을 대고, 마침내는 프랑스 啓蒙時代(계몽시대)와 프랑스 革命(혁명)에 관심을 가져 칼라일의 ‘프랑스 革命史(혁명사)’까지 읽게 되었다. 칼라일의 ‘프랑스革命史(혁명사)’는 처음에는 日本譯(일본역)을 보기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에브리 맨스ㆍ라이브러리’版(판)인 原書(원서)를 보았다. 그의 저서는 革命(혁명)의 무대극을 보는 것 같은 실감이 나서 좋았다. 이렇게 어느 하나에 반해서 미칠 지경이 되고 이런 열병을 한차례 치루고 나서는 좀 더 책을 선택하게도 되고 또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따져 보는 습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책 속에 있는 세계는 관념화된 사실의 세계이다. 근래에 어느 분의 ‘讀書論(독서론)’을 보니까 ‘…사물을 보면 반드시 서적에 의해 그 이름을 배우고, 서적에 의해 이름을 알았으면 반드시 그 사물을 보라’고 했다. 책을 읽기만 하고 스스로 思考(사고)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무엇이나 남이 생각해주는 것에 의존한다는 것은 독서하는 본래의 뜻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社會科學徒(사회과학도)는 다른 부문의 학도도 그러하지만 古典(고전)을 읽어야한다고 하는 말을 많이 한다. 思想(사상)의 원천에 접해야 된다는 말이 되기도 하고 또 여기에 덧붙여서 정신의 집중적 지속력을 키우는 수렴을 거쳐야 한다는 뜻도 있다. 이미 남이 究明(발명)한 것을 자기의 無知(무지)때문에 자기가 처음으로 발견한 듯 獨斷(독단)에 사로잡혀서도 학문하는 사람으로는 웃음꺼리이다. 또 틀리게 안 것을 평생 고칠 줄 모르게 되는 편협에 사로잡히는 좁은 안목에서 부리는 옹고집이 되어서도 不幸(불행)이 된다.
  교양으로 책을 보든 전공분야의 책을 보든 사람은 죽을 때까지 책을 통해 배운다. 先人(선인)이 구명한 것을 일일이 체험하지 않고 배우고, 先人(선인)의 경험이나 정신세계에 책을 통해 초대받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스스로 마음만 있으면 眞理(진리)의 보고는 눈앞에 있다. 이러한 행운을 누리는 것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특전이라면 왜마다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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