讀書特輯(독서특집) 冊(책)속에서 自由(자유)를

  讀書(독서)의 季節(계절)이다. 燈火可親(등화가친)의 철을 맞아 책과 벗 할 수 있어야겠다. 大學(대학)때의 독서는 어떠한 계획밑에서 어떻게 行해져야 할까-. 오는 24일부터 31일까지로 제정된 讀書週間(독서주간)을 맞아 大學時節(대학시절)의 올바른 독서생활을 爲(위)한 特輯(특집)을 싣는다. <편집자>

  讀書週間(독서주간)에 즈음하여 약간 所感(소감)을 적으려한다.
  첫째는 요즈음 학생들의 讀書熱(독서열)과 讀書力(독서력)이 형편없이 低下(저하)되어 있는 점. 물론 時代的(시대적)ㆍ環境所(환경적) 致的(소치)이겠지만 옛날의 선비내지 예전에 젊은 시절 대학생들의 그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天壤之差(천양지차)가 있다. 이렇게 讀書(독서)할 흥미도 없고 실력도 없고서야 어찌 ‘大學(대학)’生(생)이라 이를 수 있을까? 대학생의 거실에 읽을 만한 書冊(서책)이 몇 권도 備置(비치)되어있지 않고 따라서 머릿속에는 東西(동서)의 名著(명저) 몇 가지도 저축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이렇듯 요즈음의 젊은이들을 나무라는 筆者(필자)자신은 어떠한가? 다음의 솔직한 고백과 같이 필자의 書室(서실)도 빈약한 터이지만 나로선 그 이유와 주장이 따로 있는 터이니 결코 讀書(독서)를 소의함이 아니요 오히려 讀書萬卷(독서만권)의 결과라 요즈음 학생들의 실정과는 기실 대조적이다.

‘貧書(빈서)’의 辯(변)
  학자로서 무엇보다도 ‘藏書(장서)’가 자랑임은 당연한 일이요, 떳떳한 일이다. 대개 장서의 ‘富(부)’와 ‘貴귀)’가 곧 그들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富貴(부귀)’인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소위 ‘學人(학인)’으로서 이 방면에도 ‘貧窮(빈궁)’을 면치 못하여 藏書(장서)의 量(양)으로나 質(질)로나 ‘자랑’에 값하는 아무것도 없음을 서럽게 생각한다. 지금 나의 서재에는 新刊書(신간서)가 겨우 5ㆍ6백 책, 古書重刊本(고서중간본)이 백종내외, 소위 珍本(진본)ㆍ稀覯書(희구서)는 겨우 몇 가지에 지나지 못한다. 이렇게 빈약한 서재가 어디 있을까.
  내가 國(국)ㆍ漢(한)ㆍ歐(구)문학으로 여간한 學的(학적)‘명성’을 무단히 퍼뜨렸으매, 필시 만권의 書(서)를 가졌으려니, 희한한 圖書(도서)도 허다하려니 하여 종종 藏書(장서)의 量(양)과 質(질)을 물어오는 紙(지)ㆍ誌(지)와 京鄕(경향)의 後學(후학)들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참으로 무안함을 금치 못한다.
  원래 나는 藏書家(장서가)가 못된다. 젊었을 때 성미가 야릇하여 웬만한 책은 한번 읽고 내버려 간직해두는 법이 없었고 中年(중년)이래 다소 모았던 책이 몇 천권에 달했었으나 때때로 정리되고 간추려져서 ‘貯蓄(저축)’의 殘高(잔고)는 늘 빈약하였다. 한번은 평양서 敎職(교직)을 辞(사)하고 田園(전원)으로 돌아갈 때 대부분의 시시한 책들을 정리하였고, 한번은 일제 말기소위 ‘疏開(소개)’때 많은 짐스러운 너절한 것들이 추려졌다. 해방 후 또 천권내외쯤 모였던 책은 一(일)ㆍ四(사)피난 때 다 烏有(오유)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 지금 내 서재에 있는 약간의 책은 모두 환도 이후 다시 주워 모은 것이라서, 남들의 寓目(우목)할만한 것은 몇 권이 못 된다. 그중에 혹시 ‘吾家(오가)의 責氈(책전)’으로 약간 ‘珍書(진서)’라고 불리워질 책은 舊來(구래)의 所藏(소장)으로 피난 때 내가 손수 꾸러미를 만들어 들고 갔던 것들이다. 南下(남하)도중 나는 그 책들을 생명과 같이 중히 여겨 行住(행주)ㆍ坐臥(좌와)에 신세를 함께하였다. 따라서 지금 내가 그대로 秘藏(비장)하고 있는 ‘珍書(진서)’는 卷數(권수)가 그리 많지 못하다.
  사람이란 누구나 제‘가난’을 합리화하는 버릇이 있는양한데, 나는 그것에 특히 長(장)하여 자기의 ‘빈약’을 오히려 장점으로 뽐낼 만큼이다. 학자로서 서재가 빈약함이 얼마나 무색하리오마는 나는 또 그것을 장한체하는 뻔뻔한 ‘詭辯(궤변)’과 ‘遁辭(둔사)’를 가졌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소위 ‘珍書(진서)’란 것을 호자 秘藏(비장)하여 두고 그것을 정말 학문에 ‘活用(활용)’하지 못하는 단순한 ‘藏書家(장서가)’ 또는 그것을 ‘物(물)’的(적)으로 珍重視(진중시)하여 마치 유대인이 金(금)돈을 어루만지듯이 한밤에 홀로 그 骨董書(골동서)를 摩(마)사하는 소위 ‘愛書狂(애서광)’들을 敬畏(경외) 혹은 경멸할지언정 그리 尊崇(존숭)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읽지도 않고 참고도 않는 몇 천, 몇 만의 서책을 居然(거연)히 서재에 진열함으로써 자신의 無知(무지)를 반대로 擬裝(의장)하거나 혹은 단순한 ‘有效(유효)한 담벽’을 만들어 俗客(속객)ㆍ門外人(문외인)에게 헛되이 자랑하려는 武裝(무장)과 혹은 ‘책점’式(식) 서재 앞에 나는 그리 危壓(위압)과 羨望(선망)을 느끼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제게 진정 필요한 책, 꼭 없어서는 안 될 ‘읽고 참고하고 연구하는’책들을 조촐히 장만ㆍ간직하여 두고 그것을 학문에, 수양에, 생활에 실지로 活用(활용)하는 가난한 학도의 量的(양적)으론 적으나마 質的(질적)으로 야무진 서재를 나는 진정 존경 한다-. 단 이렇게 자기 서재의 ‘빈약’을 에둘러서 그럴 듯이 합리화하다가 문득 어떤 필요한 참고件(건)이 생겨 그 책이 신변에 없기 때문에 知友(지우)의 서재와 도서관을 땀 흘리며 歷訪(역방)ㆍ周遊(주유)하는 때에는 무안과 長嘆息(장탄식)을 금치 못하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얼마 전 어느 신문사에서 나의 ‘이름’에 先入見(선입견)되어 나의 ‘藏書(장서)’를 소개코자 記者(기자)가 사진班(반)을 帶同(대동)하고 내 ‘서재’를 來訪(내방)하였다. 그들이 나의 藏書(장서)가 뜻밖에 적음을 보고 사뭇 놀란 표정을 하기에 ‘가난한 서재’를 도리어 합리화하기에 익숙한 나로서도 낯이 뜨뜻하였다. 그래 彼我(피아)간에 다음과 같은 문답-.
“선생은 그리도 博覽(박람)이시라는데, 책은 다 어데 두었습니까?”
“책? 모두다 이 뱃속에 들어 있소.”
  중국 古俗(고속)에 七月七日(칠월칠일)에는 집집이 다 옷을 내어걸어 볕에 말렸었다. 晋代(진대)의 (각) 隆(융)이 그 날 이웃집 사람들이 陵羅錦繡(능라금수)의 衣裳(의상)을 보아란 듯이 내어걸어 널림을 보고, 마당의 뜨거운 햇볕에 나가 배를 드러내고 누워있었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그가 대답하는 말 “내 뱃속의 책을 말리는 중이로세.”
  내가 이 각 군의 口吻(구문)을 본떠 기자씨에게 ‘解潮(해조)’ 했으나, 그가 그리 신통해하지 않아 서운하였다. 역시 현대는 晋代(진대)가 아니라서, 학자에겐 꼭 ‘근사한 서재’, 혹은 ‘유효한 담벽’이 필요한 것인가?
 
  讀書餘談(독서여담)
  내가 평생에 ‘讀書萬卷(독서만권)’을 자랑하나, 기실 아직 읽지 못한 책도 허다하다-수양書(서)ㆍ전기物(물)ㆍ아동문학書(서)등. 아직 저 유명한 ‘영웅傳(전)’ (플루타)과 ‘안데르센’ 및 ‘팡세’ (파스칼)를 읽지 못했고, 아랍의 ‘코란’ 印度(인도)의 ‘베다’, 西國(서국)의 占星書(점성서),이집트의 ‘媚葉方(미엽방)’들은 숫제 寡聞(과문)에 속하니 아무리 博聞(박문)․多讀(다독)의 ‘旡涯(기애)’子(자)로서도 ‘吾生地有涯(오생지유애)ㆍ而知也無涯(이지야무애)”(莊子(장자))를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평생 ‘讀書遍歷(독서편력)’을 回顧(회고)컨데, 少年(소년)시절엔 ‘푸짐한 韓(한)ㆍ中食品(중식품)’들 청년시대엔 ‘輕洋食(경양식)메뉴’ 中歲(중세)이후엔 ‘된장찌개’-곧 漢(한)문학ㆍ西歐(서구)문학을 경유하여 끝내 國學(국학)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우리 속담에 “애가 장기나 잘 두면 용한가?”하듯이 ‘선비가 글만 많이 읽었으면 장한가?’글에도 가장 요긴한 것은 ‘實用(실용)의 글’(實學(실학)), 經國(경국)ㆍ濟民(제민)의 學(학)이요, 글보다 더 소중한 것은 ‘文質(문질)이 彬彬(빈빈)한 名(명)ㆍ節(절)’. ‘독서萬卷(만권)’에 의한 그런 ‘滿腹(만복)의 經論(경론)’ 혹은 ‘滿腔(만강)의 節義(절의)’가 없다면, 아무리 ‘腹中書(복중서)’를 말해도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팽팽한 공기뿐이거나, 엘리오트의 詩語(시어)대로, full of straw 일 뿐 그러니 그러한 실제적 내용과 든든한 立地(입지)를 缺(결)한, 季凡俗(계범속)의 讀書子(독서자)들에게 경계가 될 만한 내가 평생 自誦(자송)하는 陸放翁(육방옹)의 다음한 句(구)를 文尾(문미)에 붙여둔다-<高堂當日(고당당일)에 讀何書(독하서)오(높은 집 그날에 무슨 책을 읽었느뇨?)>
  그러나 남의 걱정은 차치하고-각설, 아지못게라 가을별에 말리는 내 뱃속에는 과연 거미만큼 한 ‘경륜’혹은 조개껍데기 속에 길러진 ‘진주’가 있는가, 없는가.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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