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丘文化社(신구문화사) 刊(간)

  光復(광복)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1944년에 他界(타계)한 萬海(만해) 韓龍雲(한용운)(1879~1944)님은 韓國近代史(한국근대사)에 남을 萬古不變(만고불변)의 光明(광명)이다. 그는 한생 예순다섯해를 ‘光明(광명)ㆍ正大(정대)ㆍ和合(화합)’의 生命(생명)의 意志(의지)로 하였고, 歷史(역사)의 意識(의식)으로 昇化(승화)하였으며, 民族(민족)의 指南(지남)으로 아로새겼다.
  그를 일러 僧侶(승려), 詩人(시인), 志士(지사)로 불리워질지 모르나 그는 깨달음의 한바다(萬海(만해))였다. 一切法(일체법)을 受容(수용)하고, 正覺(정각)을 실현하려는 永遠(영원)한 求道的姿勢(구도적자세)로 生命(생명)하며 나라사랑한 菩薩(보살)이었다.
  위로는 眞理(진리) 즉 光名(광명)을 追求(추구)하였고 (上求菩提(상구보제))아래로는 社會正義(사회정의)와 平和(평화)를 具顯(구현)하려고 (下化衆生(하화중생)) 一切衆生(일체중생)앞에 자기 믿음을 참되고 알차게 또한 성실하고 아낌없이 자기고백을 이행한 第一義的(제일의적)인 宗敎人(종교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衲者(납자)의 貧僧(빈승)이 되지 아니할 수 없었고 또한 ‘푸른 산빛을 깨치고’ 작은 길을 걸어가는 詩人(시인)이 되어야할 운명적인 ‘服從(복종)을 좋아하였을 것’이며 더욱이 나라사랑에 분노와 강강한 志士(지사)의 핏발이 골수에서 뿜어 나와야 했을 것이다.

  우리들은 萬海(만해)를 뒤재쳐 놓고 抗日(항일)을 말할 수 없고, 詩文學(시문학)의 ‘첫키쓰’를 맞되일 수 있으랴, 뿐만 아니라 近代(근대)‘維新佛敎(유신불교)”의 幢竿(당간)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 건가.
  그러나 그 ‘님은 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가 간지 29년 만에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님을 다시 되돌려보는 믿음들이 다소곳이 萬海全集全卷(만해전집전권)을 내놓게 된 것이리라.
  萬海(만해)가 入寂(입적)한 후 滿空神師(만공신사)는 ‘萬海(만해)없는 서울에 누굴 만나러 갈 것인가’ 개탄하였는가하면 爲堂(위당)은 ‘인도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萬海(만해)가 있다’고 격찬하였고, 日本(일본)의 政客(정객)인 頭山滿(두산만)은 ‘조선의 큰 위인이 갔다. 다시는 그런 인물이 없을 것이고 지금 우리 일본에도 없다’고 悲痛(비통)하게 넋두리하였다. 그러므로 S大學(대학)某敎授(모 교수)도 ‘近代史(근대사)에 있어서 참다운 韓國人(한국인)은 史學(사학)의 申采浩(신채호)ㆍ儒學(유학)에 朴殷植(박은식)ㆍ佛敎界(불교계)의 萬海(만해)로 지칭한다’고 하였다.
  오늘날도 ‘님의沈黙(침묵)’의 詩(시)는 많이들 愛頌(애송)되지만 그 作者(작자)에 관하여 깊은 이해가 결여됨도 사실이다. 萬海(만해)는 僧侶(승려)(priest)ㆍ愛國者(애국자)(Patriot)ㆍ詩人(시인)(Poet) 즉 3P로 약칭하며 넘본 것일까. 法身(법신)ㆍ報身(보신)ㆍ化身(화신)의 三身(삼신)을 함께 수용한 듯 無礙(무애)한 行績(행적)을 間斷(간단)없이 이루어놓았다. 그러므로 萬海(만해)를 이해하려면 위의 三分(삼분)을 一如化(일여화)하지 않고 그 眞面目(진면목)을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치우친 한 生(생)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圓融(원융)의 自由(자유)와 無罢(무파)한 평화를 成就(성취)하려고 獅子奮迅(사자분신)하였으므로 現今(현금)까지 發見(발견)된 그의 발자취인 詩(시)ㆍ小說(소설)ㆍ隨筆(수필)ㆍ論說(논설)ㆍ著述(저술)ㆍ譯文(역문) 각종 逸話(일화)를 窺察(규찰)하지 아니하면 萬海(만해)의 心海(심해)를 了量(요량)하기가 至難(지난)할 것이다.
  그러므로 崔凡述師(최범술사)가 위원장이 되고 新丘文化社(신구문화사)가 社運(사운)을 걸고 ‘韓龍雲全集(한용운집)’을 刊行(간행)한 것은 즉 萬海(만해)가 간지 29년만의 廻光(회광)이며 往生(왕생)을 기리는 追善(추선)이라 하겠다.

  세설하면 全集(전집)의 제1권은 詩人(시인)과 獨立志士(독립지사)로서의 오롯한 마음을 비추었고 제2ㆍ3권은 萬海(만해)의 佛敎觀(불교관)이 온축된 管見(관견)이며, 제4권은 譯文(역문)과 雜文(잡문)이며 제 5ㆍ6권은 長篇小說(장편소설)을 수록하여 6권의 全集(전집)을 上梓(상재)한 것이다.
  먼저 詩人(시인)으로서의 업적은 ‘님의 沈黙(침묵)’(1926년 초판) 城北洞(성북동) 尋牛莊散詩(심우장산시) 18편ㆍ神境(신경)의 世界(세계)를 時調化(시조화)한 32편ㆍ漢詩(한시)를 國譯(국역)한 1백63편이 있다. ‘님의 沈黙(침묵)’이나 여타 몇 편의 詩(시)들은 발표되었으나 漢詩國譯(한시국역)은 미발표의 것이므로 萬海(만해)의 詩(시)사상理解(이해)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흔히 新詩(신시)의 先驅(선구)로 간주되는 朱耀翰(주요한)의 ‘불놀이’보다 1년 앞선 1918년 ‘惟心(유심)’誌(지) 창간호에 발표된 ‘心(심)’이라고 題(제)한 萬海(만해)의 詩(시)는 더욱 新詩的(신시적)인 性格(성격)을 띠어 斯界(사계)에 새로운 注目(주목)을 끌게 한다.
  愛國人(애국인)으로서의 지조는 당대 누구에게 겨눌 수 없는 확신으로 立志(입지)하고 있었다. 특히 1919년 檢事(검사)의 답변으로서 옥중에서 쓴 ‘朝鮮獨立(조선독립)의 書(서)’(제1권)는 理路整然(이로정연)한 愛國(애국)의 길과 獨立(독립)의 理由(이유)를 밝혔다. 이것은 六堂(육당)이 기초한 ‘己末獨立宣言書(기말독립선언서)’보다 이상 가는 것이며 특히 公約三章(공약삼장)은 萬海(만해)가 첨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가슴 찢는 逸話(일화)가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萬海(만해)는 佛敎人(불교인)으로서 近代(근대)에 있어서 둘도 없는 先覺者(선각자)였다. 그가 1910년에 탈고한 ‘朝鮮佛敎維新論(조선불교유신론)’은 63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維新佛敎(유신불교)’해야 할 방책의 龜鑑(귀감)이 될 名論(명론)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도 ‘佛敎大典(불교대전)’ ‘維摩詰所說經講義(유마힐소설경강의)’ ‘十玄談註解(십현담주해)’등과 불교 제반문제에 대한 그 당시의 管見(관견)을 論破(논파)한 103편도 全集(전집) 제2ㆍ3권에 轉載(전재)되어있다. 제4권에는 ‘菜根譚講義(채근담강의)’와 ‘乾鳳寺事蹟記(건봉사사적기)’등이 수록되어있다.
  그리고 제5, 6권에 실린 小說(소설)은 1935~1936년 朝鮮日報(조선일보)에 연재된 ‘黑風(흑풍)’과 ‘薄命(박명)’ ‘後悔(후회)’ ‘鐵血美人(철혈미인)’ 등이며, 遺作品(유작품)으로 中篇(중편)‘죽음’이 있다.
  한말로 표현하면 ‘廣大無邊(광대무변)’한 哲願(철원)을 한 몸에 지닌 지칠 줄 모르는 求道者(구도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님’을 추구하였고, ‘님’과 일치하려 하였다. 또한 찾을 수 없는 그 ‘님’을 상징화하여 열렬한 信仰(신앙)의 불길에 자기를 풀무질하기도 하였다.
  衆生(중생)의 惱亂(뇌란)을 자기의 것으로 深化(심화)시킨 萬海(만해) 그는 宗敎人(종교인)으로, 志士(지사)로, 또한 詩人(시인)으로 變容(변용)되지 아니하면 그 자신을 가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三性具顯(삼성구현)이 곧 三乘卽一大乘(삼승즉일대승)의 本軌(본궤)에 參入(참입)함을 悟覺(오각)한 것이다.
  늦게나마 萬海(만해)의 全貌(전모), 부언하면 菩薩(보살)됨의 참모습을 姿婆(자파)에 듣날리게 하여준 全集(전집)은 衆生(중생)의 心鏡(심경)이 될 것이다. 이 가을에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번 깊은 思惟修(사유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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