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客(관객)은 演劇(연극)에 同化(동화)돼야

  9月(월)28日(일) 혼자서 연극을 보러 소극장에 갔다. 公演作品(공연작품)은 서머셋 모옴 원작의 ‘정복되지 않은 여자’였다.
  연극은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배한 스와송이라는 마을의 여교사 안네트가 술에 취한 독일 장교에게 난행을 당하고 임신까지 하게 되는데, 그녀의 父母(부모)들마저도 현실을 받아들여 독일장교 한스와 결혼할 것을 종용하지만 그녀만은 남동생을 죽이고 사랑하는 약혼자마저 앗아간 적에게 끝까지 항거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여기서 연극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려 함이 아니다. 관객의 태도를 얘기하려 한다. 극장 안은 연극이 시작되기 前(전)에 벌써 입추의 여지도 없이 관람객이 꽉 들어찼다.
  첫 막이 열리고 독일장교와 그의 친구가 길을 잃고 안네트의 집에 찾아 들어오는 장면에서 누군가 “어색하다”라고 외치자, 장내가 웃음바다로 된 것을 기화로 연극이 끝날 때까지 관중들의 연극을 보는 태도는 단적으로 난장판 바로 그것이었다. 대사에 뒤이어 대꾸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휘파람, 조소의 웃음과 비난의 말 등 장난기 섞인 관중들의 태도가 관객 모두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나는 지난 토요일(25일)7시 소극장 바로 그 자리에서 연극 ‘감마선은 달무늬 얼룩진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보았었다.
  그때의 극장 안에는 교복을 착용한 고등학생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그들의 연극을 보는 태도는 아주 진지했다. 조금 어색하다 하여 또 말의 표현이 우습다하여 한 사람이 조소하면 덩달아 야유하며 폭소를 터뜨리다니…무대 위의 주인공보다 오히려 내가 시선을 좀 끌어보겠다는 영웅심리가 발동했음인가? 우리는 반성해 보아야만 되겠다.

  현대 연극은 그나마 대학생들에 의해서 그 가느다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고들 세간에서는 말해진다. 우리가 연극의 겉면만 보고 바보스런 웃음을 흘릴 때, 어린애 같은 태도를 취할 때, 연극의 명맥을 大學生(대학생)들이 유지해 온다는 그것이 정말 현실에서 살아있는 것인지, 이미 죽은 것을 실로 얽어매고 있는 것인지 깊은 의심을 통계한다.
  나는 그 장난스런 태도에서 묘한 슬픔을 분노와 함께 맛보았다. 꽉 들어찬 관객들과 빛나는 눈을 보고 연극을 아끼는 동국인들로 착각한 것에 대해 내 자신에 대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원래 연극은 연기자와 관객과의 호흡이 어느 종합예술보다 요구된다. 관객은 어느 의미로 보면 연기자의 서툰 연기가 있을 때 그 연기 자체를 美化(미화)시키고 연극전체를 관객 나름대로 소화시켜 연극의 분위기에 同化(동화)되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은 호소력이 강하고 연기자의 가는 숨소리까지 관객에게 흡수되는 것이다.
  엘리트, 지성인, 저의의 수호자를 자칭하는 젊은 우리가 연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킬 줄 모르고 ‘연극은 最高(최고)의 藝術(예술)’이라는 찬사를 보내고 연극을 평할 수 있을까? 일부를 보고 전체를 평하지 말라고 일부를 보고 전체를 평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지만 일부가 준 그 하나의 인상을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의 연극을 우리가 아끼고 사랑해주자. 우리가 격려의 박수를 보낼 때 무대 위의 그들은 조소의 함성보다 더 큰 충고의 목소리로 듣고 있음은 분명하다. 조소와 야유 같은 채찍보다 뜨거운 격려가 자극제로는 훨씬 효과가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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