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陵(영릉)’은 이조 제4대 임금이신 世宗大王(세종대왕)의 陵號(능호)이다.
  世宗大王(세종대왕)은 兒名(아명)이 莫同(막동)이요, 휘(諱)는 도(祹), 字(자)는 元正(원정)이시며, 시호(諡號)는 蔣獻大王(장헌대왕)이시고, ‘世宗(세종)’은 廟號(묘호)이다.
  大王(대왕)께서는 22세에 즉위하여 54세에 돌아가시기까지 在位(재위) 32년간에 朝鮮王朝(조선왕조) 500년간은 물론 三國(삼국)이래 歷代(역대) 君王(군왕) 가운데에서도 가장 찬란한 치적을 남기신 가위 不世出(불세출)의 聖君(성군)이시다. 世宗(세종)은 文治(문치)뿐만 아니라 武治(무치)에도 힘을 기울여 武備(무비)를 단단히 하고, 특히 太祖(태조)이래의 계속 사업인 北方(북방) 개척에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어 豆滿江(두만강) 방면에서는 六鎭(육진)을 개척하고, 鴨綠江(압록강) 방면에서는 四郡(사군)을 설치하여 한민족의 現(현) 疆域(강역)確定(확정)케 하였지마는 그 치적의보다 찬란함은 文治(문치)에 있고, 그중에서도 白眉(백미)는 위대한 한글의 創制(창제)다.

  한글(訓民正音(훈민정음))은 世宗(세종) 25년 12월에 親制(친제), 완성하시고 28년 9월(陰(음)) 上澣(상한)에 이를 頒布(반포)하셨으니, 10월 9일 ‘한글날’은 이 頒布日(반포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임은 周知(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固有文字(고유문자) 한글을 가지게 됨으로써 비로소 우리말을 편리하고 완전하게 表記(표기)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로고 진정한 우리의 文學(문학)과 民族文化(민족문화)의 창달을 기할 수 있게 되었거니와 그 문자의 制字上(제자상)의 獨創性(독창성)과 科學性(과학성)및 簡潔性(간결성)에서, 이는 世界(세게) 文字史上(문자사상) 類例(유례)가 없는 가장 우수한 音素文字(음소문자)다.
  鄭麟趾(정인지)는 訓民正音解例(훈민정음해례) 序文(서문)에서 “비록 바람소리, 鶴(학)의 울음소리, 닭의 울음소리, 개 짓는 소리까지도 다 쓸 수 있다.”고 하였고, 또 배우기가 쉬워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이 다 가기 전에 깨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다 배운다.”고 하여, 그 優秀性(우수성)을 극찬하였는데, 이는 추호도 我田引水(아전인수)의 과대평가가 아니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世界(세계)에 文化民族(문화민족)임을 자랑할 수 있다. 이로써 ‘한글날’ 制定(제정)의 意義(의의)가 크고 깊음을 再吟味(재음미)하게 되고, 이날이면 大王(대왕)의 한글 親制(친제)의 聖德(성덕)을 追慕(추모)하는 情(정)이 더욱 도타와짐을 누를 길이 없다.

  우리는 國文科(국문과)ㆍ國敎科(국교과) 학생들은 해마다 한글날이면 驪州(여주) 英陵祭(영릉제)에 參祀(참사)하여 정중히 화환을 봉헌하고 大王(대왕)의 遺德(유덕)을 추모하는 동시에 國語(국어)ㆍ國文學徒(국문학도)로서의 한글 문화창조의 정신과 자세를 다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한글전용과 國漢文(국한문)혼용의 상반된 주장 속에 文字生活(문자생활)의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英陵(영릉)에 가면 바로 이웃한 孝宗(효종)의 영릉(寧陵(영릉))에도 들르게 되는데, 나는 번번이 이런 생각을 한다. 孝宗(효종) 당시만 해도 寧陵(영릉)은 그 音(음)이 다 ‘녕릉’이었으니 문제가 없으려니와, 지금은 英陵(영릉)이나 寧陵(영릉)이 다 ‘영릉’이니 세종대왕의 英靈(영영)은 이 同音異名(동음이명)과 관련하여, 오늘의 우리 文字生活(문자생활)에 대해 무어라 말씀하실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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