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濟(경제)ㆍ社會的(사회적) 側面(측면)

  우리가 6ㆍ25事變(사변)을 치른 지 어언 26년이 지났으며 또 그간에 이 나라의 經濟生活(경제생활)이나 社會生活(사회생활)이 괄목할 만큼 발전했다는 것은 누구도 否認(부인)못할 것이다.
  이미 주지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해방과 더불어 국토가 南北(남북)으로 兩斷(양단)되었고 그에 따라 산업구조가 반신불수격으로 되었다함은 여기서 새삼스럽게 말할 나위없다. 그리고 이 때문에 모처럼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業體(업체)라는 것도 技術者(기술자)가 모자란 탓으로 多數(다수)가 폐문되었고 그로인해 생산이 크게 감소하는 한편 고용량이 대폭 줄어들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生産(생산)이 위축되고 물자가 부족한 상태였으므로 국민생활이 넉넉할 리가 만무했고 그 위에 선 社會(사회)가 안정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도 한국국민을 도탄에 빠뜨리지 않고 구출한 것은 대대적으로 지원된 미국의 무상원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外國援助(외국원조)에 의해 이 나라의 經濟(경제)가 회복되려는 찰나에 소위 6ㆍ25動亂(동란)이 발발한 것이라고 보겠다.

  이 事變(사변)이 3년 동안이나 계속된 바람에 모처럼 남겨졌던 諸般産業施設(제반산업시설)들이 灰燼(회신)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회간접자본이 적지 않게 파괴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 때문에 재정규모는 팽창되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국민들이 戰時(전시)인플레까지 겪게 되었음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3년간은 경제의 發展(발전)은커녕 완전히 하나의 공백기였다고 속단해도 좋을 성싶다.
  휴전이 성립한 54년부터 우리나라경제의 재건과 안정이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고 보겠는데 앞서 지적한 것처럼 산업시설이 사변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게 파괴되었으니 産業構造(산업구조)의 跛行性(파행성)은 사변전보다도 더욱 深化(심화)되었을 것임이 뻔하다. 참고로 休戰(휴전)이 成立(성립)되었던 해의 우리나라 산업구조를 본다면 1차 산업이 47.1% 2차 산업이 7.2% 3차 산업이 45.7%였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휴전성립부터 61년까지의 사이에 外國援助(외국원조)는 우리나라에 약 23억 달러가 도입되었다고 하며 그 外援(외원)이 적든 많든 이 나라의 경제의 안정과 부흥에 이바지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볼 때 원조중의 생산재란 겨우 동란시 파괴된 부분의 부흥을 위한 소극적인 것에 그쳤고 원조액의 근 70%이상이 消費財(소비재)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소비재 중심의 원조가 단기 물가안정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하기는 하였겠지만 한편에 있어서 소비상의 과시효과를 자극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줄로 안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원조가 經濟開發(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뜻한 대로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는 뜻이라 하겠다.
  까닭에 61년의 우리나라 産業構造(산업구조)는 1차 산업이 44.1% 2차 산업이 11.9% 3차 산업이 44.0%란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이같이 아직도 1차 산업의 비중이 2차 산업에 비하여 훨씬 높다고 하는 즉 산업구조의 原始形態(원시형태)의 테두리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제성장이 이 기간에 없었던 것은 아니며 연평균 4.4%라는 低率成長(저율성장)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 성장을 主導(주도)한 것도 다른 산업보다 더 높은 신장을 이룩한 2차 산업 부문이라는 點(점)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저율성장의 經濟類型(경제유형)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킨 것이 바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개시라할 수 있다. 開發計劃(개발계획)을 착수한 62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경제는 연평균 9.3%라는 높은 성장을 이룩하고 있으며 그 위에 몇 해 전부터는 質的(질적)으로도 고도화를 기하고 있다. 이리하여 국민총생산은 53년의 4백81억 원에서 75년의 9조2천5백17억 원(經常市場價格(경상시장가격))으로 팽대되고 있다.
  그리고 産業構造(산업구조)라는 것도 작년에 1차産業(산업)이 25.7%, 2차産業(산업)이 27.1%, 3차 産業(산업)이 45.2%로서 그 구성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고 느껴진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 50년대의 우리나라 工業(공업)이란 대부분 규모가 작은 외에도 前近代的(전근대적)인 형태로써 經營(경영)되어왔다 해도 과히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또한 板(판)유리 시멘트 등 일부 중화학공업이 同年代末(동년대말)에 개발되기 시작은 했지만 섬유를 비롯하여 식료품 등을 중심으로 한 輕工業(경공업)이 大宗(대종)을 이뤘다고 못 박아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개발계획이 시작된 후부터 종래의 경공업부문의 시설들이 근대화 및 대규모화했음은 물을 것도 없고 道路(도로)와 電力(전력)등 社會間接資本(사회간접자본)이 擴充(확충)되고 있음과 동시에 精油工業(정유공업)을 위시하여 소다灰(회), PVC, 화학섬유 등의 中間(중간)화학공업 및 自動車(자동차), TV, 電氣冷藏(전기냉장) 석유화학공업, 鐵鋼工業(철강공업), 非鐵金屬綜合製鐵(비철금속종합제철), 大型造船所(대형조선소) 등 국제규모의 중화학공업들이 차례로 건설되어 稼動(가동)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工業化率(공업화율)은 53년의 6.1%로부터 74년에 벌써 30.5%로 그리고 중화학 공업율은 14.2%에서 40.1%로 각각 상승하고 있는 형편에 있다. 실로 놀랄 만큼 공업화가 진전되었다고 아니할 수 없겠다.

  그 밖에 經濟開發計劃(경제개발계획)을 단행함과 더불어 開放經濟體制(개방경제체제)를 채용한 탓으로 貿易量(무역량)도 크게 伸張(신장)하였다. 즉 지난 57년에 2천2백만 달러 밖에 아니 되었던 우리나라輸出(수출)은 75년에는 5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또 輸入(수입)은 같은 기간에 4억4천2백여만달러로부터 72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뿐아니라 貿易對象國(무역대상국)도 50년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擴大(확대)되고 있다.
  한편 6ㆍ25이후 특히 經濟(경제)의 開發計劃(개발계획)이 추진되는 동안 國家經濟(국가경제)가 高度(고도)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우리 國民(국민)의 1인당 소득도 50년代(대)의 80달러線(선)에서 75년의 5백 달러線(선)으로 높아졌고 그에 따라 이 나라 國民(국민)들의 經濟生活(경제생활)과 社會生活(사회생활)의 수준이 얼마나 提高(제고)되었는가는 알고도 남는 일이라 하겠다. 國民(국민)들의 消費構造(소비구조)의 변동을 볼 것 같으면 문화를 포함한 사회생활의 수준이 향상되었음을 역력히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經濟(경제)가 성장하여 소득이 증대할수록 食料品(식료품)에 지출되는 構成比(구성비)는 낮아지고 있는 반면 家具施設費(가구시설비)를 비롯하여 飮料品(음료품), 交通(교통), 通信(통신) 및 遊興娛樂(유흥오락)등의 費用構成比(비용구성비)는 높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경제개발계획의 시행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不少(불소)하다. 그중의 한가지로서 都市(도시)와 農村間(농촌간)의 隔差(격차)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개발계획을 한때 不均等理論(불균등이론)에 입각해서 운영한 탓으로 都農隔差(도농격차)가 심하게 나타난 적이 있다. 아니 개발계획착수 이전부터 우리나라의 농촌과 도시는 으레 差(차)가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고 評(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개발계획에서 그간 줄곧 農家所得(농가소득)의 增大(증대)는 물론 文化施設(문화시설)등의 설치에 힘썼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최근에는 官民合同(관민합동)에 의한 새마을 事業(사업)의 전개로 말미암아 農村(농촌)도 상당히 살기 좋은 바탕을 이루고 있음이 사실이다. 50年代(년대)와는 달리 요즘은 幹線地域(간선지역)에는 高速道路(고속도로)가 부설되어 있어서 農村生活(농촌생활)도 도시생활 못지않게 멋있게 營爲(영위)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 위에 要地(요지)에 工團(공단)이 형성되어있는가 하면 곳곳에 工場(공장)들이 건설되어 있으며 農業外(농업외) 所得(소득)을 지방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게 되어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事由(사유)로 인하여 벌써 재작년부터 農家所得(농가소득)은 都市(도시)의 근로자소득을 계속 앞지르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요컨대 요즘 우리나라의 經濟(경제)나 社會(사회)가 6ㆍ25당시에 비해 隔世之感(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크게 발전했음을 다시 한 번 말해두려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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