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治(정치)ㆍ軍事的(군사적) 側面(측면)

  一, 序言(서언)
  우리는 가끔 지금 우리의 狀況(상황)이 戰爭直戰(전쟁직전)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말을 듣는다. 분명히 南北間(남북간)의 긴장은 昨年(작년)에 있었던 衝擊的(충격적)인 事件(사건)(越南(월남)의 共産化(공산화)) 後(후)에 급격히 증대되었고 戰爭(전쟁)의 可能性(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에 많은 사람의 意見(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이러한 緊張感(긴장감)이 증대할수록 우리는 6ㆍ25前夜(전야)를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그 때의 狀況(상황)을 이해한다면 앞으로의 事態(사태)를 전망하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어떤 敎訓(교훈)을 얻어 事態(사태)를 예측하고 지난날의 쓰라린 前轍(전철)을 밟지 않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여기에 6ㆍ25前(전)에 韓國(한국)이 지니고 있던 政治(정치) 및 軍事的環境狀況(군사적환경상황)과 지금의 그것을 비교하기로 한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時間距離(시간거리)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그때를 기준으로 오늘을 그대로 평가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다만 하나의 중요한 要素(요소)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二, 國際關係的(국제관계적) 側面(측면)
  1940年代(년대)와 50年代初(년대초)는 南北韓(남북한)이 모두 완전히 自意志(자의지)에 의해서 政策(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하였다. 즉 國際的要因(국제적요인)이 크게 작용 되여 우리의 運命(운명)이 결정됐다는 것이다. 이런 條件(조건)은 비록 정도의 차는 있으나 지금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국제관계적 側面(측면)이 중요시될 수 있는바 그 측면에서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6ㆍ25당시에는 우리가 절대적인 국제지위의 優位(우위)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러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UN에 의해서 우리는 정통성이 부여됐고 거의 一方的(일방적) 支持(지지)를 받았다. 國際承認(국제승인)에 있어서도 우리는 훨씬 앞서 있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UN에서 對等化(대등화)가 진행되고 國際承認(국제승인)도 거의 비슷하게 받고 있는 형편이다.
  둘째, 당시에는 美國(미국)의 防衛意志(방위의지)가 表明(표명)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뚜렷이 行動化(행동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美國(미국)은 韓半島(한반도)가 전략적으로 결정적인 意義(의의)를 갖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45年以後(년이후)에 駐屯(주둔)했던 美軍(미군)을 49年(년)에는 완전히 철수시켰으며 50年初(년초) ‘애치슨’ 美國務長官(미국무장관)은 韓國(한국)을 防衛線內(방위선내)에 포함시키지 않음을 밝혀(이른바 아류산과 일본 및 오끼나와를 잇는 AㆍJㆍO線(선)의 設定(설정)) 南侵(남침)의 素地(소지)를 만들고 말았다. 지금의 美國(미국)은 防衛條約(방위조약)을 바탕으로 4萬名(만명)의 軍隊駐屯(군대주둔)으로서 行動(행동)에 의한 韓國防衛意志(한국방위의지)를 보이고 있고 核使用(핵사용)까지도 公言(공언)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中(중)ㆍ蘇(소)의 對(대)북한지원은 당시나 지금이나 같이 적극적이지만 남침을 적극적으로 종용하지 않고 있는 점에서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40년대 美軍撤軍(미군철군)의 기운이 있던 무렵 金日成(김일성)은 中(중)ㆍ蘇(소)를 순방하여 南侵計劃(남침계획)을 승인받고 막대한 무기지원을 받았다. 무기의 적극적 지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때와 같은 남침의 적극적 종용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三, 國內政治(국내정치) 및 南北關係的(남북관계적) 側面(측면)
  상대방의 국내 상태여하가 전쟁행동을 일으키는데 있어 중요한 考慮要素(고려요소)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쌍방의 相關關係(상관관계)에서 유도되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와 지금의 政治(정치) 및 相關作用面(상관작용면)에서 본 차이를 추려본다.
  첫째, 당시의 우리는 準軍事的治安狀態(준군사적치안상태)가 매우 약했으나 지금은 완전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自生的(자생적)(南勞黨系(남로당계))또는 外生的(외생적)(南派者(남파자))인 게릴라들이 태백산에서 지리산에 걸쳐 계속 준동했고 그것은 48년 정부수립 후 50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치안의 불안은 자연히 現役軍人(현역군인)의 후방배치를 초래하여 前方警備力(전방경비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지금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당시의 南韓(남한)은 政治的(정치적)으로 二重分裂(이중분열)을 하여 國家統合力(국가통합력)이 극히 약했으나 지금은 潛在分裂要因(잠재분열요인)에도 불구하고 政治(정치)가 혼미에 빠져 있지는 않다. 당시의 南韓國民(남한국민)은 左右翼(좌우익)의 분열과 右翼(우익)의 원천적 분열이라는 二重分裂(이중분열)을 하고 있었는바 50년에는 左翼(좌익)의 南勞黨系(남로당계)가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소탕됐으나 잠재화하고 있었고 右翼(우익)의 金九(김구) 및 金奎植系(김규식계)는 體制內的(체제내적) 勢力(세력)이 안 되고 있었다. 지금 與野(여야)의 分立(분립)은 體制內的(체제내적)인 것이며 다만 일부의 非體制內的(비체제내적) 세력이 존재하고 있어 分裂(분열)의 잠재요인은 體制維持(체제유지)나 政治統合力(정치통합력)을 근원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셋째, 주민의 조직화가 당시와 지금이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으나 약간의 질적인 차가 있다는 점이다. 당시에도 鄕防團(향방단)이 있어 朝夕(조석)으로 훈련하고 학도호국단이 조직되어 상당한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도 비슷하다. 그러나 당시의 鄕防團(향방단)은 軍事經驗(군사경험)이 없는 자들로 구성된 것이고 지금의 예비군과 민방위대는 군사경험을 한 사람이 주력을 이루면서 예비군의 경우 당시와는 질적으로 다른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당시에나 지금이나 北韓(북한)의 평화공세는 매우 활발하였지만 守勢(수세)에 일관한 당시와는 달리 지금의 한국은 攻勢性(공세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戰爭直前(전쟁직전)인 6월7일 南北總選(남북총선)을 제의하면서 핵심적인 韓國政府(한국정부)의 지도층을 제외할 것을 요구하고 6월 19일에도 單一政府樹立(단일정부수립)을 북한憲法(헌법)에 따라 하자고 제의한바 있다. 이것들과 요사이 우리에게 反共法(반공법)철폐를 요구하고 南韓當局(남한당국)과 회담하지 않겠다는 것을 밝히는 것 간에는 유사성이 있다.

  四, 軍事力側面(군사력측면)
  戰爭遂行(전쟁수행)의 결정적 요소는 軍事力(군사력)이라는 점에서 당시와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첫째, 당시에는 兵力(병력)의 南北(남북)비율이 꼭 1대2였으나 지금은 6.5대 5로 우리가 오히려 우세하다. 通常的(통상적) 在來戰(재래전)을 중요시하지 않고 核戰(핵전)에 치중했던 당시의 美當局(미당국)은 韓國(한국)에 있어서의 養兵(양병)을 소홀히 했고 動員潛在人口(동원잠재인구)에 있어서도 남북 간이 비슷했기 때문에 북한은 우리의 倍數(배수)의 병력을 보유했으나 우리는 治安維持力(치안유지력)도 되지 못했다.
  둘째, 당시의 韓國(한국)은 治安上(치안상) 後方(후방)배치에 많은 병력을 뺏기고 있었으나 북한은 그러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셋째, 당시의 한국은 공격용武器(무기)(예컨대 탱크)를 전혀 갖지 않았으나 북한은 탱크 2백42대를 보유했다. 이에 비해서 지금의 남북한의 탱크保有臺數(보유대수)는 1대1.2로 북한이 약간 우세할 뿐이다.
  넷째, 당시에는 쌍방이 모두 공격용 항공기를 갖지 않았으나 지금은 북한의 1천1백6대對(대) 4백32대의 비율로 쌍방이 공격용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五, 結言(결언)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6ㆍ25당시와 지금은 너무도 많은 狀況差(상황차)를 보이고 있다. 그러한 차이와 관련하여 당시의 상황을 바탕으로 몇 가지 示唆(시사)를 받을 사실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첫째, 정치적 혼란과 국민적 分裂(분열)이 敵(적)의 침략을 초래시켰다는 사실이다.
  둘째, 美國(미국)등 우리의 우방이 뚜렷한 한국防衛(방위)의 決意(결의)가 없었을 때 南侵(남침)이 강행됐다는 사실이다.
  셋째, 우리의 對備(대비)능력이 훨씬 뒤진 상태에서 침략을 당하게 됐다는 점이다.
  넷째, 敵(적)의 상황에 대한 誤判(오판)(美軍(미군)의 不介入(불개입)등)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사실이다.
  이상의 사실들에 비추어 우리의 安保(안보)는 국민적 團合(단합), 우방과의 협력, 확고한 對備態勢(대비태세)라는 3대條件(조건)이 갖추어질 때 보장될 수 있다는 敎訓(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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