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에게
  기온이 영하 4,5도로 내려가는걸 보니 확실히 추워졌다. 이젠 기온이 더 떨어지면 떨어졌지 오르지는 않을 모양이다. 실은 허약한 너인데도 눈만 똥그랗게 기억되는 너는 어느 곳에서든지 잘도 견뎌 내리라 생각이 든다. 네가 떠난지 벌써 한 달인데,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사뭇 여러 가지 일들이 동시에 살아나서 한편으론 걱정도 된다. 그 친한 친구들과 헤어져서 담 너머로 유행가 가락을 들으며 이 世間(세간)의 때 묻은 뉴우스에 아직 미련을 갖고 있다면, 그건 단지 내사치한 추측에 불과하리라 접어 두자.
  헷세의 이런 말이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온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보다 나은 정신적 彼岸(피안)을 목전에 두고, 오늘도 내일도 용맹정진 할 너는 그래도 행복하다. 주어진 일과 앞에 말없이 굴종하면서 수없이 고민하는 아침을 맞는 너는 그래도 축하해주어야 할 녀석이다. 차라리 부러운 터이다.
  이 사회라는 메커니즘의 文明(문명) 현장은 어제 오늘 비난을 받아왔던 게 아니고, 어제 오늘 뜻있는 철학자 사회학자들을 울려온 게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언젠가는 消滅(소멸)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알던 이가 빠지듯 하나하나 소멸해가고, 마지막으로는 勝者(승자)와 敗者(패자)만이 남을 것이다. 다가올 미래의 양자택일의 엄연한 논리 앞에 누가 가슴 졸이지 않겠는가.
  H, 너는 잘 알지 않느냐. 어떤 상황이 너를 얼마나 이롭게 하고 영예롭게 만드는지. 그 상황이 어렵고 절박하면 할수록 너는 더 위대해지는 법이다.
  가상의 목표를 정하고 人間(인간) 存在(존재)와는 별다른 곳에 행동반경을 설정할 때 그 곳은 動物性向(동물성향)의 人間(인간)이 판을 친다. 그러나 주목할 건 가상의 목표다.
  그건 언제나 연습에 불과하고, 실제의 네 목표는 네 人生(인생) 전부를 모험으로 요구하는 더 혹독한 살인자다. 너의 싸움은 이 보이지 않는 살인자와의 끝없는 대결이다. 결국 네가 敗北(패배)하고야 마는 뻔한 투쟁일지라도 피해서는 안 되는 숙명의 대결이다.
  H, 절대로 울어서는 안 된다. 너만이 특정한 인물이라는 幻想(환상)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한 개개인이다. 지금 네 창가에 눈이라도 내린다면 즐거운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 족하다.
  이 눈을 눈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 말거라. 간교한 꾀로 자신조차 묶인 수많은 선배들이 지금은 화투와 증권과 하루의 運勢(운세)로 연명하고 있다는 씁쓰레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상당수의 젊은 친구들이 젊다는 이유만으로 또한 그리되었다. 젊음은 꾀도 아니고, 허황된 만용도 아니며, 나약한 감상주의를 신봉하는 무리를 일컫는 말도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터져버린 봇물처럼 늘 안으로 인내하고, 사색하다가 견딜 수 없는 극한점에서 個人(개인)으로 發言(발언)하는 行爲(행위)야말로 한 世界(세계)를 부수고 새로 태어나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너는 위대해질 수 있는 거다. 부언하지만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추우면 추울수록 한마디의 유언을 위해서 참고 견디거라. 네가 떠난 후 나는 두서없이 이런 생각에 잠겨서 당분간이나마 너의 생활을 정리해줄 궁리를 했단다. 되도록 너를 더 혹독한 위치로 몰아넣고 싶은 치기가 용솟음쳤단다. 그것도 우정이라는 편리한 이름을 빌려서.
  H, 진정한 사랑은 버리고 짓밟고 하는 잔악성 속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한마디의 忠告(충고)로 족히 대화하자. 아직 성숙된 입(口(구))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 솔직한 입장 아니냐. 우선 주변 학문도 열심히 해두고, 이 시대의 추악한 것이라는 것은 모두 다 봐두고 익혀둬라. 우선은 똑똑히 알아둬라.
  H, 쓸데없는 말만 너무 지껄여댄 것 같다. 너의 똘망한 두 눈빛이 더욱 강렬하게 돋보이는 걸 보니 너 화난 모양이로구나. 아니다, 아니야. 너는 그 똘망한 눈빛 때문에 작은 것엔 실패해도 큰 것엔 利(이)를 얻는다는 네 애인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니? 그 눈에 화기 같은 건 담지마라. 추운데 건강에 유념하고. 안녕.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