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書畵展(중국서화전)과 ‘夢遊桃園圖(몽유도원도)’ 隨感(수감)

  10월 文化(문화)의 달을 거쳐 11월에 접어들어는 書畫展(서화전)의 푸짐한 잔치가 줄을 이어 내남없이 眼福(안복)을 누리는 판이다.
  조촐한 개인전과 화려한 回顧展(회고전)이 판을 치고, 77年度(년도) 繪畫(회화)의 마무리인 國展(국전)에 이어 특히 韓國民族美術硏究所(한국민족미술연구소)(소장 金映雨(김영우))에서는 澗松(간송) 수집의 中國(중국) 繪畫展(회화전)을 차려 詩書畫(시서화) 삼위일체의 경지를 맛보는 기회를 안겨 주었다. 곧 趙孟頫(조맹부)(부)의 八駿圖(팔준도)를 필두로 藍瑛(남영)과 石濤(석도)는 물론 趙之謙(조지겸)의 眞蹟(진적)을 내걸어 그림 가운데에 詩(시)가 감돌고 詩(시) 가운데에 그림이 곁따라 그림을 읽는 호젓한 맛을 엿보여 同好(동호)로 하여금 눈을 씻게 했음은 진실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국립도서관에서는 中國現代書畫展(중국현대서화전)과 中國書籍展(중국서적전)을 열었었고, 內外經濟新聞(내외경제신문)에서는 韓中日書藝展(한중일서예전)을 가져 우리의 書品(서품)이 차지한 현주소가 과연 어디만큼인가를 비교해서 살피게 되어 감명이 자못 새로웠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韓中藝術聯合會(한중예술연합회)(회장=朴鍾和(박종화))에서 臺北(대북) 歷史博物館(역사박물관)의 珍品(진품)인 中國古代書畫展(중국고대서화전)을 덕수궁 현대 미술관에서 열어 본바닥에서도 보기 어려운 珍品(진품)이 무더기로 왔다. 곧 敦煌(돈황)에서 나온 淡彩(담채) 絹本(견본)의 淨名天女圖(정명천녀도)와 南宋(남송) 夏珪(하규)의 溪山無盡圖(계산무진도)와 黃公望(황공망) 沈周(침주) 文徵明(문징명) 仇英(구영) 唐寅(당인) 八大山人(팔대산인) 石濤(석도) 金農(김농) 翁力綱(옹력강) 등의 그림이 즐비하고, 한편 董其昌(동기창) 成親王(성친왕) 何紹基(하소기) 劉墉(유용)의 名筆(명필)이 찬란했다. 특히 옹골진 金農(김농)의 그림 글씨 같은 腕筆(완필)에는 아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저마다 스스로의 맛과 멋을 물씬물씬 풍겨 이른바 書卷氣(서권기) 文字香(문자향)으로 방안이 위안되어 정말 황홀스런 보람판이었다.
  마침 이번 여름 대만에 건너가서 국립故宮(고궁)박물원에서 晩明燮化體繪畫展(만명섭화체회화전)을 깡그리 읽고 온 나였고, 덩달아 歷史博物館(역사박물관)의 진열품을 샅샅이 훑어 읽고 온 처지라 다시금 마음이 설레어 자꾸 눈을 씻었다.
  아다시피 故宮博物館(고궁박물관)은 北京(북경)박물관을 비롯하여 中國五千年(중국오천년)의 예술의 앙금을 모아 놓은 세계적인 寶庫(보고)이고, 歷史博物館(역사박물관)은 南京(남경)박물관의 수장품을 송두리 채 옮겨다 놓은 곳이다. 그러니 그 규모는 하도 어마어마해서 揚言(양언)조차 부질없다.
  여기에서 상기되는 것은 中國繪畫(중국회화)의 높고 깊은 格調(격조)다. 오죽하면 중국의 名品(명품)은 본다지 않을까. 글씨는 맡고 그림은 읽는다고 한다. 사실 콤포지션부터 우람스럽고, 톤이 매양 가멸차고, 테크닉이 매우 참스러워 그 짬짜위가 소담스럽다. 거기에는 바자로운 솜씨가 宣紙(선지)밖에 넘나고 黑白(흑백)과 設彩(설채)의 번짐이 腹書(복서)로 무르녹아져 사뭇 생동한다. 구태여 繪事後素(회사후소)를 내세워 文人畫(문인화)인 南畫(남화)와 畫院畫(화원화)인 北畫(북화)를 따질 것도 없고, 皴法(준법)이나 中鋒(중봉)이 하도 밋밋해서 용회의 나위가 없다. 오브제와의 대화를 통한 간추림에 古拙(고졸)이 묻어나고, 삶의 생생한 입김이 파닥거려 자자함에서다. 먹발이 꿈틀거리는 글씨에서 맥박의 생동함을 맡을 수 있음에서다. 그러니까 장엄한 自然(자연)을 조리개로 조려서 가슴속에 재웠고, 그 대상을 어리미로 쳐서 폭삭 가라앉힌 솜씨는 과시 놀랍다. 딴은 그네들의 古書畫(고서화)는 그 많은 인구에서 그것도 百年(백년)에 하나가 날까 말까한 大手(대수)인데다가 그 무리에서도 精核(정핵)만이 오늘에 전해졌다는 사실부터 깨쳐야 비로소 이해가 올발라진다. 얼마나 훌륭했으면 오늘에까지 간수되었겠는가 곰곰 따짐이 이른바 玩賞(완상)에의 첫걸음이다.
  게다가 느닷없이 安堅(안견)의 夢遊桃園圖(몽유도원도)가 매스컴을 타서 온통 우리의 조바심을 사고 있다. 진작 日本(일본)에 건너갔다가 번개처럼 훌쩍 읽을 진한 인상이 하도 탐스러워 어거지로 칼라에 담아온 나였다. 그것을 劉風烈(유풍렬)씨가 韓國繪畫大觀(한국회화대관)을 만들 무렵 빌어드렸던 바도 있다. 물론 촬영이 공교치 못해 色相(색상)을 반감했었다.
  워낙 이 그림은 壬辰亂(임진란)때 하마 놓쳤다지만 그것은 짐작이고, 倭政(왜정)과 더불어 日人(일인)에로 넘어가 당시 李王家美術館(이왕가미술관)에서도 되사들이고자 무진 애를 썼으나 속절없이 거관들의 군침만 다시게 했었다고 李王職(이왕직)의 푸념을 전해 들었었다. 그 뒤 日本(일본)의 政客(정객) 하라(原(원))씨가 지녔다가 그 집안에 처분하기에 앞서 제법 善心(선심)을 쓴답시고 우리 要路(요로)에 연락되어 자칫 우리 손에 넘어올뻔도 했었다. 그때 우리는 6․25동란 후 부산에 임시 수도가 있을 피난시절이었다. 그런데다가 값이 너무 호된 3만불(당시 6천만원)이었고, 또 口味(구미)가 당겨 東京(동경)으로 물건을 보러갔던 당시의 재벌 S씨의 눈에 차지 않아 못내는 天理大學(천리대학)으로 넘겨져 쉽게 볼 수도 없는 指定寶物(지정보물)이 되고 말았다. 실은 비단에 그려진 그림과 잇대어 써진 題賛(제찬) 등이 하도 낡아 함부로 보여줄 수도 없는 실정이다.
  그때 나도는 소문에는 그림의 바탕이 내에 쩔은 듯 시꺼먼데다가 한번 혹 불기만 해도 가루처럼 날아갈듯 삭아서 돈이 아까워 사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실로 하나만 아는 소갈머리였다. 글쎄 후지즈까(?塚(?총))가 갖고 간 阮堂(완당)의 歲寒圖(세한도)를 되찾아 온 素荃(소전)이었더라면 그 흥정은 필경 이루어졌을 것을 생각하니 더욱 안타깝다.
  하여간 夢遊園圖(몽유원도)는 安堅(안견)의 그림만이 아니라 직접 꿈을 꾼 당사자요 그 꿈속에서 휘들어지게 노닌 환상을 밝힌 安平大君(안평대군)의 題跋(제발)을 비롯하여 成三問(성삼문) 朴彭年(박팽년) 申叔舟(신숙주) 金宗瑞(김종서) 徐居正(서거정) 金守溫(김수온) 등 20餘(여)의 題贊(제찬)이 고스란해서 아주 값지다. 게다가 製作年代(제작연대)가 뚜렷한 代表作(대표작)인 점에서 진작부터 珍品(진품)으로 알려져 그 間架(간가)와 布置(포치)는 詩書畫(시서화)의 경지를 넘났다. 따라서 蘭雪軒(난설헌)의 夢遊廣柔山詩序(몽유광유산시서)와 더불어 李白(이백)의 獨道難(독도난)을 연상하며 널리 회자되었었다.
  이 夢遊桃園圖(몽유도원도)가 돌아온다니 정녕 꿈만 같다. 저 曇徵(담징)이나 率居(솔거)는 엄두도 못 내지만, 아득한 옛날 細烏女(세오녀)가 짜서 보낸 비단이 어두워진 故國(고국)의 하늘을 밝혔듯이 일단 외국에 넘어갔던 보배가 어서 되돌아와서 날로 껄끄러지고 달로 헤벌어지는 우리의 書畫壇(서화단)에 새로운 불씨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하늘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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