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소리 내어 말할 뻔했다. 그러나 나는 급기야 한마디 내질렀다.
  <아버지! 돌아가세요. 알았다구요. 알았어요.>
  아버지의 싸늘한 눈총이 내 전신을 핥고 있다고 느껴졌다. 멍한 현기증이 피어올랐다.
  다리 난간을 붙잡은 채 나는 억지로 거기에 의지해 발을 옮겼다. 보라는 듯이 당당히 걸어갈 생각이었다. 엉덩이의 찌릿한 통증이 무릎을 타고 내려와 발을 디딜 때마다 불안스러웠다. 이제 막 새살이 돋은 곳을 지면에 딛는 것처럼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아니 간지럽히다 못해 옥신옥신 쑤시고 있는 것이었다. 바지의 주름이 바람에 떠는 것보다 더 작고 빠른 흔들림으로 사정없이 후들거렸다. 다리의 모든 힘이 다 빠져나갔다. 그러나 난간에 기대어 조금씩 움직여왔다.
  다리 마지막에 왔을 때 나는 한숨을 쉬듯, 위험한 모험에서 이제야 풀려난 듯 교각을 서둘러 움켜잡았다. 내가 알지 못한 새에 이미 어둡기 시작했다. 가게의 그림자가 진한 어둠을 담고 길거리에 길쭉이 가로누워 있었다.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집 없는 나그네가 다시 밤을 맞아 짙은 향수에 멍하니 서 있는 기분이 되어 있었다. 너무 심한 운동을 했던 것 같았다. 피곤했다. 빨간외투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서있던 자리에는 무례한 놈이라는 차거운 냉소만이 남아있었다. 거리가 나 자신을 내어 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밤을 밝히던 모든 가로등이 정전으로 일시에 꺼져버린 듯했다. 집들도 상점의 진열장도 암흑이었다. 이젠 아무리 내가 손을 뻗어도 잡히는 건 없었다. 빈손에는 매서운 바람이 날카로운 촉감으로 와 닿았다. 어둠만이 눈앞에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누가 내 어때 밑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잡아드리지요>
  빨간외투의 음성이었다. 아직 가지 않고 내 옆에 서 있던 것을 내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마왔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따뜻한 모닥불이 여기저기 순식간에 살아나 내 전신을 뜨겁게 덥혀 주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물먹은 소리로 말했다.
  <고맙군요. 그러나 서울로 돌아가야겠어요.>
  <막차도 떨어졌을 거예요>
  그녀가 내 등 뒤로 손을 둘러 나를 꼭 잡아 줬다.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이 등판에 퍼져 나갔다. 아픔도 한결 덜했다.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그녀에게 기대서 징검징검 걸어갔다. 무슨 말이나 변명 한마디를 꼭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말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가 말했다.
  <과묵한 분 같아요. 그러나 나처럼 밉지 않을 계집애가 있는데 정말 그러기예요?>
  그녀는 이제 어느 정도 밀착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사물이 이제야 눈을 뜨고 두런두런 속삭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판자벽이 석양의 진홍색 온기를 머금고 화덕처럼 반짝였다. 그녀가 내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녀가 방긋이 미소를 지어줬다. 그 얼굴은 석양이 서려 잇는 수줍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가게에서 나온 청년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악, 악, 유행가를 합창하는 소리가 점점 귓전에서 멀어져갔다.
  집들이 하나 둘 물러나면서 나지막한 산 하나와 검은 들판이 나란히 나타났다. 바람이 차라리 시원하게 얼굴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머리가 나부껴서 내 얼굴을 부드럽게 핥고 갔다. 나는 드디어 내가 팔닥팔닥 숨을 쉬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가졌다. 들판에서 마른 풀 냄새가 끼쳐 왔다. 산으로 오르기 위한 풀밭 길로 접어들면서 온 들판도 마른 풀의 서걱이는 소리로 벌떡벌떡 숨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아프다는 생각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대신으로 그 안에는 따스한 온기가 가득차서 화끈화끈 열을 발산해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의지한 채 어둠에 함몰되기 시작하는 마음을 가만히 바라봤다. 너무 오랫동안 병원에 방치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평범한 내 일상에 뛰어들고, 그래서 평범히 흘러가고 있다고 느꼈다.
  아아, 나는 가느다란 신음을 내질렀다. 그녀가 그런 나를 다 이해하겠다는 듯이 더 센 힘으로 껴안아 줬다.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위로 포개어졌다. 우리는 풀 더미 위로 쓰러졌다.
  그때 나는 분명한 음성을 다시 들었다.
  <사내자식이 그렇게 쉽게 눈물을 보여서야 쓰나.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아버지.
  나는 손을 펼쳐 줄기만 남은 마른 풀잎을 한 무더기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머리칼이었다.
  <왜 이래요. 왜. 아프단 말예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힘껏 잡아 당겼다. 그러지 않으면 한 순간도 견뎌 배길 수 없을 듯한 연민 같은 것이 속에서 갑자기 부글댔다. 그녀가 내 가슴을 떠밀며 발악을 했다. 뜨거운 공기가 기도(氣道)의 중간에서 딱딱 멈췄다. 나는 쉽사리 흥분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어느 틈엔지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고 달아났다. 나는 지쳐 풀 두덕 위에 쓰러져 있었다. 얼마 후 가만히 눈을 떴다. 꼭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 전부가 구름처럼 사라져 버리고 모든 것이 날카롭고 역력하게 가슴 속에 새겨졌다. 잠시 동안 숙이를 생각했다.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숙이가 아닌 지금 현재로서의 적나라한 숙이를 생각했다. 숙이의 영상이 빨간외투와 겹쳐 보이는 것이 어쩔 수 없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얼굴 위로, 옷깃 위로 사륵사륵 내렸다. 산과 들이 눈에 덮여 부드럽고 둥근 평면으로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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