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일 것 같애요>
  그러나 가야지요.
  <시골 길 한 시간 반은 가벼운 걸음이 아녜요>
  당신이나 먼저 가 줬으면 좋겠습니다. 먼 건 둘째지요.
  <만난다는 여자분은 친구예요?>
  순간 나는 당혹감에 빠졌다. 도대체 어쩌자는 걸까. 아주 내 자존심을 짓밟아 버리자는 속셈일까? 그녀의 욕망이 내 속살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만지고 있었다.
  다리 옆에 버드나무가 앙상한 가지로 늘어져 있었다. 전파상에서 울려나오는 유행가 소리가 추위에 떠는 소녀의 울부짖음처럼 아프게 가슴에 파고들었다.
  숙이가 나에게 편지 한통을 보내온 건 내가 입원한 바로 직후였다. 그러니까 내가 들어본 그녀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기다리겠어. 이 한마디로 너에 대한 내 모든 예의를 대신할까해. 서울을 떠나겠어. 오늘 학교에 가서 애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지. 그러나 학교를 그만 둘 것이라든지 하는 말은 아예 안 했어. 어느 때처럼, 내일 아침 다시 만날 것처럼 가볍게 목례를 나누고 돌아섰어. 욕심을 내고 싶지 않아졌을 뿐야. 다 우스워지겠지. 단순해지고 싶어.
  지금까지 쌓아온 그 많은 허위와 자만과 고집의 성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싶어졌어.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살고 싶어. 죄야. 너를 사귀었던 죄라고 라도 변명하고 싶어. 그러나 너에게 ‘病身(병신)’이라는 누명은 주고 싶진 않아. 정말야, 정말이란 말야. 내가 네 옆에서 지켜본 너의 사고는 너에 대한 내 부채야. 꼭 나아 그 후 만나. 그때까지 기다릴래. 그래야 체면도 설 것 같고.>
  편지를 다 읽고 난 나는 기집애, 하고 뜻 없는 욕을 속으로 지껄였다. 내 감정은 그녀의 따귀라도 갈겨주고 싶은 혐오로 변해 있었다. 나를 하루아침에 몰락시켜 버린 그 사고조차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려고 하는 것이 차라리 더 미웠다. 순탄한 코스에서 이탈되어 길가에 처박혀있는 버스를 보는 기분이 되어 실소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녀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갈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찾아가 화를 내고 싶었던 그녀를 오히려 무관심으로 기다리다가 이제 찾아가는 것이다. 만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심정이 되었지만, 그런 건 다 참기로 했다.
  빨간 외투를 흘깃 바라봤다. 숙이가 오늘까지 내게 무엇으로 존재해 왔는지를 그녀는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기억은 만나야 한다는 어떤 강렬함만 남기고 있었다. 그 강렬함 때문에 역으로 다른 것들은 다 빛을 잃고 한갓 낙엽 한 잎이나 돌 하나로 기억되고 있는지 모른다.
  버드나무가지가 겨울인데도 늘어져있는 꼴이 새삼스럽게 생각됐다. 다리 위로 다가가니 아이들의 소음이 일시에 울려왔다. 바람이 빙판위의 얼음가루를 하얗게 날렸다. 역시 이 마을도 마침내 살아 꿈틀꿈틀 요동하고 있다는 인상이 뚜렷이 들어와 박혔다.
  다리 건너편 작은 가게 속에서 청년들의 웃음소리가 날려왔다. 그 소리 때문에 다시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언가 강력한 거부의사로 귀 언저리를 맴돌았다. 엉덩이에 따끔따끔한 통증이 또 왔다. 그녀가 내 표정을 보더니 못볼 걸 봤다는 듯이 얼굴을 경련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냥 도망치지 않았다. 다시 앙징스럽기조차 한 상냥한 음성으로 물었다.
  <심하세요?>
  나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으로 지금까지 그녀와 나를 얽매고 있었던 끈을 재빨리 놓아줘 버렸다. 노골적으로 이를 악물고, 가 버려, 라는 성난 표정을 지었다. 제발 나 좀 혼자 놔둬. 건너편 가게에서 더 큰 웃음소리가 껄껄껄, 하하하, 끅끅끅, 들려 왔다. 다리의 난간에 기대어 귀를 막았다. 두 손으로 꼭 틀어막았다.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얘 힘을 내야 된다. 완쾌된다는 신념을 버리지 마라>
  아들을 지켜보기가 지겨워진 아버지의 목소리는 병원의 낮은 시멘트벽에 울려 사뭇 싸늘하게 들렸다. 나는 잠자코 갈색의 천정을 바라봤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그 평면에 수많은 도형들을 멋대로 그려 넣었다. 삼각형과 사각형, 9자와 3자, 이런 것들을 그리고, 또 그리며 그려진 것들을 다시 그려보기를 무작정 반복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이 여전히 울렸다. 사기질의 그릇이 맞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쉼 없이 괴롭혔다. 사방의 벽에 부딪혀서 애코우가 되어 들려왔다.
  예, 예,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지극히 충실한 아들이 될 것입니다. 여부 있겠습니까? 지당한 말씀이시지요. 빨리 나아야죠. 매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 일인데요. 내 몸 나도 잘 알지요. 너무 너무 잘 알아요. 정말 이젠 술 따윈 먹지 않을래요. 그러니 제발 참아 주세요. 돌아가십시오. 돌아가십시오.
  눈썹이 마주칠 때마다 눈언저리가 미끄러웠다. 갈색의 천정만이 크게 확대되어 눈에 들어왔다. 난 울고 있나 보았다. 창피했다. 적어도 아버지 앞에 서만은 내 나약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불을 둘러썼다. 그러나 두려웠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짓을 나는 전에 노골적으로 해 보지 못했다.
  <얘기 하던 김에 마저 끝내자. 한번쯤의 실수는 병가상사(兵家常事)다. 낙심할 것 없다. 좀 서운한 얘기다만 다리 좀 절름거린다고 할 일 못할 것도 없잖니? 전화위복이 돼야 된다. 너도 보아 하니 꿈이 큰 놈인데, 우선은 공부나 해 둬라>
  나는 그 말이 가진 뜨거움과 썰렁함을 동시에 이해했다. 이젠 큭큭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의 말과 관계없이 나는 나대로 반성하고 있었다. 아버지에게의 두렵던 기운이 더욱 강하게 옥조여 왔다. 그것을 걷어내려는 애씀도 없이 더 큰 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불쌍한 아버지. 이 머저리 같은 자식을 믿고…. 불쌍한 아버지. 고집도 끈기도 없이 절망만 하고 있는 이 병신 같은 자식을 믿고…. 그러나 허굽니다. 아버지는 허구의 성만 높이 높이 쌓아올리고, 보잘대기 하나 없는 자식을 보고 웃고, 그리고 기대하는 겁니다. 속지 마십시오. 나는 나만큼 밖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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