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못 보일 것을 보여 준 것 같은 얼굴 화끈거리는 창피가 나를 그 자리에서 되도록 빨리 떠나게 했다. 그런 예쁜 아가씨는 예쁜 것만 보고 살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역시 이 마을도 살아 있구나, 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살아 있다>는 확인이 두려워졌다. 껀발 서 걷듯 조심히 걸어서 얼른 이 마을을 빠져가고 싶었다.
  엉겁결에 입을 손바닥으로 다시 막았다. 기침이 심하게 목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볼록하게 마른 양 볼이 팽팽하게 팽창되어 왔다. 목에 느끈한 힘이 갔다. 숨통이 막혔다. 이어서 허리를 가로질러 뜨끔뜨끔한 전류가 흘렸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추운데 몸 좀 녹이면 한결 낫잖아요>
  어느새 빨간 외투가 등 뒤에 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 지은 얼굴만이 보였다. 적당히 내놓은 하얀 이빨이 얼음같은 강한 차거움을 주었다. 호흡이 멈춰진 나는 아무런 자존심도 없었다. 꿈틀꿈틀 목줄기를 묵직하게 살아 넘어오는 이물질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급기야 기침을 해 버리고 말았다. 호흡기를 따라 들어간 찬 공기가 목줄기와 폐부를 얼얼하게 했다. 전신(全身)까지 시큰했다. 손수건으로 입 가장자리를 닦으며 숙여진 머리를 들었다. 그녀가 바로 내 얼굴 앞에 서 있었다. 내 내부에 진즉부터 자리 잡고 있던 어떤 이질감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무언가 꼭 거부당할 것만 같은 불안이 나를 부자연스럽게 했다.
  <이제야 가시는군요.>
  나는 갈그락거리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그녀가 아까 차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란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뜻밖의 일을 저지르고 처벌을 기다리는 어린 학생처럼.
  술에 만취하여 숙이를 만났던 때가 있다. 나는 골목의 담벼락에 의지하여 가버려, 가버려,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었다. 어서 너 갈 데로 떠나가 달라고 외쳤었다. 어둠속에서 숙이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눈빛이 넌 바보로구나, 하고 말하고 있었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해 왔다. 그녀가 휑하니 도망쳐서 골목길을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의 눈빛에 잡혀 꼼짝할 수 없었다. 그 수분(數分)간의 두려운 정적. 팽팽하게 긴장됐던 고무줄이 딱하고 끊어지려는 마지막 순간.
  <도와드리고 싶은 데요.>
  빨간 외투의 꽃잎 같은 고운 입술이 작게 열렸다 닫혔다. 휴우,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뿜었다. 그녀는 동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나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다. 하나 하나 내 몸짓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듯 내 외투 깃이라도 잡아끌 눈치였다.
  나는 몸을 추스렸다. 늘어진 어깨를 좀 올리고, 되도록 아무 일도 아니라는 표정을 만들고 싶었다. 입을 열지 않은 채 작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참을 만한 걸요>
  먼저 가라고 말하려다가 차마 그렇게는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앞서 가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다. 염치를 아는 어린애가 바지에 오물을 배설해놓고 부끄러워하는 꼴이 된 자신이 더없이 원망스러웠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올 날렸다.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고개를 뒤로 젖혀 정돈했다. 그 모습이 꼭 밤에 달을 바로 보고 서 있는 소녀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너머로 보인 것은 검푸른 하늘이나 달빛 받은 나뭇가지는 아니었다. 암울한 잿빛 하늘 아래 펄럭이는 검정색 루핑의 찢어진 조각이었다. 그 옆으로 굴뚝 하나가 보였다. 상당히 오랫동안 불길이 닿지 않은 듯 차거운 냉기를 머금고 있었으나, 그 밑은 두꺼운 창호지를 바른 창문이 돋보였다. 흡사 조금이라도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안간힘 같았다.
  숙이에게 가 버리라고 객기를 부려본 다음 나는 숙이의 시선이 두려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녀의 냉소가 가슴을 후회로 충동질시켰다. 술기운이 쑥스러움만 남기고 내 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발자국소리가 또박또박 들리다가 멀어져가는 듯했다. 드디어 숙이가 가는구나. 숙아, 제발 멈추거라. 거기 서거라. 술 먹고 지랄해 본걸 오해하지 말거라. 나는 속으로 수없이 뇌였다. 달려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잘못했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제발 거기 섰거라. 다신 그런 헛된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겠다.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는가 싶었다. 서둘러야 한다. 서둘러 쫓아가리라. 그러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뒤따라 갈 엄두가 안 났다. 그녀가 벌써 버스 정류장 앞에까지 가서 서성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확연했다. 모두들 제 나름대로 잘 생활해 가고 잇는데, 나는 왜 이 모양으로 되어가고 있는지 뼈저린 반성이 됐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획 돌아섰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이 창피한 공간으로부터 벌거벗기어지도록 방치될 수는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숙이었다. 그녀는 도망가지 않고 내 앞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녀의 부추김을 받으며 골목길을 빠져 나갔다.
  <어머 담배가 다 탔네요.>
  빨간 외투가 내 손가락을 건드려주었다. 순간 나는 손을 재빨리 움츠렸다. 하얀 잿도막을 단 담배가 내손 가락 사이에 떨어져 나갔다. 잠시 멈칫했다가 계속해 걸었다.
  <데진 않았어요?>
  이 여자는 아마 실수한 배우에게 손뼉을 치며 좋아할 여자가 틀림없다. 나는 그런 박수를 받은 배우처럼 난처했다. 이쯤에서 한마디 해 두어야 되겠다고 내심으로 다짐했다. 귀찮게 굴지 말아줘요. 혼자 갈수 있어요. 봐요. 난 아직 병신이 아녜요. 퇴원 전까지 난 떳떳할 수 있어요. 그 이후 내가 완쾌되어서 아가씰 돕지요. 그때 만나지요. 그러나 말을 꺼내진 않았다. 버스 안에서 그녀는 어느 정도 날 엿보았을 테니까.
  군용 트럭이 한 대 길 앞쪽에서 부릉거리며 다가왔다. 얼어붙은 땅거죽에서 먼지가 부옇게 일다가 곧 사라졌다. 메케한 매연만이 그녀와 나 사이에 남았다. 다시 기침을 할 것 같았으나 억지로 참았다. 목 언저리에 쓴 알약이 얹힌 것 같이 께름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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