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신춘문예 최다 배출의 원동력

 

편집자주
우리대학 문학도들이 2011년 신춘문예에 대거 당선되며 동국 문학의 전통을 이어갔다.  2010년에 이어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다. 동국문학의 중추를 형성했던 동국 문학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후학들은 노력과 열정으로 당당하게 전통을 계승해 가고 있다.

 

“또 동대야?!”
어느 문학상 시상식에서 한 비평가가 내게 한 말이다. 그는 서울 유명 대학의 국문과 교수이면서 유수한 문예지의 편집위원으로, 여러 문예지와 신춘문예의 단골 심사자로 활동하는 평론가다. 그의 말 속에는 최근 동대 문창과의 활발한 문단 진출에 대한 놀라움과 찬탄, 그리고 약간의 시기와 질투의 감정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난 그 말에 “허허, 글쎄말이오.”라며 웃고 말았지만, 가슴은 터질 듯 뻐근했다. 바야흐로 동국 문학이 중흥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제삼자를 통해 확인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맞이한 동국 문학의 중흥

‘동국문학사는 한국현대문학사와 그대로 통한다.’ 동대 국문과에 입학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문학공부를 하면서 작품과 논문을 통해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동국문학의 화려한 전통은 과거의 희미한 그림자로 스러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와 불만이 생겨났다.

1970년대 경희대와 서울예전 출신의 약진에 비해 동대 국문과 출신의 문단 진출은 현저히 기세가 꺾였던 것이다. 실제로 1970년대 신춘문예로 등단한 동국인의 숫자는 매우 초라하다. 1960년대 학번은 재학생 가운데 절반이 문인이었다는 말에 과장의 혐의가 짙은 건 사실이지만, 그들은 동대 국문과가 한국 최고의 국문과라는 세간의 평가에 걸맞는 실력과 활약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신춘문예 등단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희귀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동대 문학 중흥의 움직임은 1977년 여름방학 법주사에서 은근히 발아되고 있었다. 그해 국문과에 부임한 홍기삼 교수가 오국근, 김장호 교수와 의기투합하여 ‘여름 창작교실’을 개최했던 것이다. 재학생과 졸업한 선배 문인, 외부 초청 문인 등 50여 명이 5박6일 동안 산사(山寺)에서 침식을 함께 하며 문학과 인생을 얘기하는 이 프로그램은 참가자들에게 참신한 자극과 충격을 주었고, 이후 동대 국문과의 대표적인 행사인 동시에 등단을 위한 필수코스로 인식된다.

창작교실 출신 최초의 시인 김강태(71학번)를 비롯하여 올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예에 이르기까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고 등단한 이는 한 명도 없다. 지금은 이런 성격의 문학 행사가 다양해졌지만, 대학에서 개최하는 문학 워크숍으로는 가장 오래되었고 성과도 탁월한 게 바로 동국대의 ‘여름 창작교실’이다.

동국 문학 중흥의 두 번째 계기는 1996년에 시작되어 2001년 보다 뚜렷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1996년 국어국문학과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학부제(국어국문학부)로 확대 개편하면서, 국어국문학전공과 문예창작전공으로 이원화하는 실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 제도는  고전문학과 국어학 전통을 유지하면서 창작문학을 보다 활성화하기 위한 집중과 선택의 전략이었는데, 2001년 문창과가 예술대 단일학과로 독립하면서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2002년 문창과 재학생(신현대, 00학번)이 세계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하여 동대 문학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더니, 연말에는 제1회 대산문학상(시 부문, 박경아, 00학번)에서 또다시 동대 이름을 떨쳤다. 이후 문창과 재학 및 졸업생의 문단 진출은 주변을 경악케할 정도였으니, ‘주간 동아’의 “동국대가 신춘문예 휩쓰는 까닭”(2011. 1. 17)이란 기사는 동대 문학의 약진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보고서다.

문예대학원생의 신춘문예 진출도 빼놓을 수 없다. 초기에는 기성문인이 입학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대학원에 입학한 후 등단하는 이의 숫자가 증가하는 역전현상이 나타났는데, 비로소 문예대학원이 정상적인 궤도로 들어선 것이다. 이에 따라 최근 개설한 일반대학원의 문예창작전공자 중에서도 조만간 좋은 성과를 보이리라는 기대가 크다.

전통 잇는 후학 양성 체계

동국 문학은 만해를 조종(祖宗)으로 하여 신석정, 서정주, 조지훈, 이범선, 조연현, 이형기, 신경림, 황석영, 조정래, 박제천, 문정희, 정채봉… 등 한국문학의 중추를 형성했고, 그 전통과 저력은 지금까지 힘차게 이어지고 있다.

동대 국문과와 문창과 신입생은 선배들의 위업에 놀라면서 자신도 그분들과 함께 한국문학의 태백산맥을 이루는 한 봉우리가 될 수 있다는 자긍심을 갖는다. 그들은 신입생 백일장과 여름창작교실 등 학과 행사에 참여하면서 동대 문학의 저력을 새삼 확인하고, 부모보다 연배가 높은 선배의 다정하고 자상한 배려와 조언에 감동한다.

백일장에 온 선배들이 현재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해 교과서나 언론매체를 통해 자주 접했던 분들이라는 사실에 갓 입학한 신출내기 문사들은 자부심을 갖는 것이다. 이처럼 동국문학은 대선배와 까마득한 후배가 한 자리에 모여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하는 기회를 자주 만들고, 그런 토양에서 재능 있는 후배들이 튼실한 뿌리를 내리고 건강한 싹을 키운다.

각 장르 실기 수업과 분과 모임은 재학생 활동의 처음이자 끝이다. 매주 한 차례 이루어지는 시, 소설, 희곡, 독서 분과 모임에서 학생들은 선배의 지도와 합평을 통해 작품을 쓰고 고친다. 이 고통스럽고 즐거운 과정을 통해 각자의 재능이 드러나고, 선후배 사이의 끈끈한 관계가 이어진다. 분과 모임에서 한번 담금질 당한 작품은 창작 실기 수업에서 재차 호된 제련을 거치면서 조금씩 향상된다.

분과 활동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모임이지만 실기 수업과 긴밀한 연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서 상승효과를 낳는다. 어떤 면에서 재학생 선후배끼리 합평하는 분과 모임은 정규 커리큘럼보다 더 가혹하고 진지한 수업일지 모른다. 또한 재학생들에게 특정한 장르만 고집하지 말고 다양한 장르의 수업을 고루 듣게 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그들의 창의력을 계발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동대 문창과의 교강사는 창작 수업만이 아니라 스터디 혹은 멘토링의 방식을 통해 꾸준히 학생들과 소통한다. 동대 국문과와 문창과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교수 연구실 문턱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내 학창시절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학생들이 편한 마음으로 연구실에 올 수 있게 한다.

때로는, 관심 있는 학생이 수업에 참석하지 않거나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내가 직접 그를 호출한다. 그리고 최근의 생활과 습작에 대해 묻고 그의 고민을 경청하고 작품을 써 올 것을 주문한다. 이런 작업은 문창과 수업을 하는 교강사 거의 전부가 하는 일이어서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문창과 재학생의 신상에 대해서나 습작활동, 심지어 이성교제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학생과 선생 사이의 간극을 좁혀 보다 가깝고 믿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든다.

이런 관계는 졸업 후에도 이어지는데, 문창과 졸업생 모임 ‘해토머리’와 문예대학원생 모임 ‘동대미문(東大未聞)’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모임을 통해 소설의 윤고은, 유응오, 채현선 등이 작가가 되었다.

중흥 위해 계속되는 노력

2011년 새해에도 동대에서는 일곱 명의 작가를 배출했다. 그 중 네 명은 문창과, 세 명은 문예대학원 출신이고, 다섯 명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이런 수치는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로, 지난 2009년 8명의 등단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주간동아 기사대로 삼 년 동안 지속적으로 이런 결과를 낸 학교는 동대 외에 달리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모든 성취는 하루아침에, 한두 사람의 노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핀 대로 동국문학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후학들의 노력과 열정이 융합하여 요즘의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동국 문학사의 첫장이 만해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부터 우리에겐 커다란 자랑과 긍지다.

동국문학의 후예들은 부단히 사색하고 실천하고 창작하면서 만해의 맥을 당당하게 계승해왔다. 동국문학 백 년 동안 잠시의 침체도 없지 않았으나, 슬기로운 스승과 열정 넘치는 학생이 함께 노력하여 난관을 거침없이 돌파했다. 여름창작교실, 문예대학원개설, 문창과 독립, 대학원 문예창작전공 개설 등이 동국문학의 중흥을 위한 제도적 노력이라면, 재학생들의 분과활동이나 졸업생의 스터디 및 멘토링 등은 인간 관계를 통한 실력 양성의 토대였다.

이 모든 제도와 개별적 노력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지금의 동국 문학 중흥이 가능해진 것이다. 여기에 학교 당국의 관심과 지원이 더해진다면 동국문학은 새로운 역사와 전통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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