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등굣길.
  베토벤의 ‘운명’이 언덕길을 따라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난 계절 오늘의 이 길을 오르기 위해 가슴 졸이던 나와 그 나를 지켜보던 눈초리들. 햇살이 스며 내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그 눈빛들이 다시 나를 이끌어 주며, 잡아주고, 저 위로 향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베토벤의 ‘운명’은 몇 번이고 우울과 실의, 그 뒤에 오는 득의의 순간이 교차되었다 그러면서 위로 오를수록 그 음(音)은 더욱 커지고 우렁찬 것이었다. 그렇지, 몇 번인가 넘어질지도 모르고 아물지 못한 상처에 가슴 아파할는지 모른다. 그것은 다 껍질을 깨는 아픔으로 받아 들여야지. 어쩌면 마지막 학교생활일 대학의 문 앞에서 이 명예로운 관문의 들어섬은 내게 하나의 성스런 의식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대담하고 세심하게 나아가리라’고 마음 깊이 맹세한다. 신의 존재는 느끼지만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완전한 사람으로서 구실을 다 해야 한다.
  우리는 신상카드의 직업란에 ‘학생’이라고 쓴다. 그러나 직업인은 아니다. ‘아마츄어’. 사회는 우리를 지켜보기만 한다. 당장은 아무 것도 없는 가능성만이 잠재해 있는 우리.
  ‘아마츄어’라는 말은 듣기가 좋다. 부담이 없다. 잘하면 좋지만 못한다 해도 별로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다음번에 잘하면 된다. 그래서 ‘아직은’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여유를 남겨두는 게 아닌가.
  대신 ‘프로’가 되었을 때, 일촌의 여유도 있을 수 없다. 마음의 여유는 있을지언정 느슨한 마음은 없고 생활도 거기 따라야 하는 것이다. 충실한 직업인으로. 그야말로 그 나름의 ‘~답게’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것이다.
  대학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명제가 일생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구해지고 얻어내져야 하듯 대학의 의미 역시 끊임없이 추구되어져야 한다. 여태껏 많은 선배들이 대학을 거친 뒤, 또 거치며 우리에게 말했다. ‘대학은 무엇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생활이다.’
  허나, 이제는 새 출발과 같은 것. 백지와 같은 상태에서 출발해야겠다. 도중에 실패도, 무모함도 있겠지만 우리는 아직 젊은 20대. 가능성만의 아마츄어다. 어디에 우리가 할 일이 있을 지 자신 말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것. 생활의 아마츄어이지만 자꾸 자신을 키움으로써 자기가 지금 서 있는 땅의 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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