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風惟苦吟(추풍유고음)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창외삼갱우)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가을바람 괴롭게 읊조리는데, 세상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물구나. 창밖은 비가 내리고 삼경인데 홀로 등잔불을 바라보며 마음은 만리 밖을 생각한다.)
孤雲(고운) 崔致遠(최치원)은 그의 唐(당)나라에서의 고적한 심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특히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면 내 마음은 문득 서글픈 심정을 느끼며 천리 먼 故鄕(고향)으로 가 있게 된다. 즐거운 나의 집을 떠난 지는 비록 두 달에 不過(불과)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고향이 그리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늘 고향을 憧憬(동경)하는 그러한 感傷主義(감상주의)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나도 삶을 營爲(영위)해 나가는 어엿한 人間(인간)이기에 生活(생활)속에서 나를 알고 나를 찾게 되는 것이다.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오던 날 집안 걱정은 말고 오직 學業(학업)에만 專念(전념)하라고 하시던 부모님,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우리들의 友情(우정)은 변하지 말자고 하던 정다운 벗, 그리고 나를 위해 座右銘(좌우명)으로 ‘不撓不屈(불요불굴)’이라는 글을 써 주신 모교의 恩師(은사)님, 플랫폼에 나와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흔들던 누이동생, 이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떠오른다. 그날 밤 列車(열차)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비정한 결심을 했던 것이다. 배워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그러던 것이 지금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나의 決心(결심)이 흐려진 탓인지 그렇지 않으면 생활의 어려움에서 번민하고 있는 것인지 그럴 때마다 自慰(자위)하곤 한다.
나는 서울역으로 나갔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역대합실은 한산하기만 하다. 고향 사투리를 듣기 위해 정거장으로 간다고 하는 말이 한 치도 에누리 없는 말 같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차속에서 뇌까려 본다. 人間(인간)은 모두 孤獨(고독)한 存在(존재)다. 어쩌면 박제된 標本(표본)과 같이 對話(대화)가 없는 人間(인간)인지 모른다. 서로 依持(의지)하고 友情(우정)을 베풀면서 사는 것만이 고독을 除去(제거)하는 唯一(유일)한 方法(방법)인 것이다.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精神(정신)은 人間(인간)만이 所有(소유)할 수 있는 가장 高貴(고귀)한 것이다.
지금은 子正(자정)이 지난 고즈넉한 밤이다. 창밖은 비로 흠뻑 젖어있고 望鄕(망향)의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어둠의 창밖만 쏘아보는 것은 遊學生(유학생)의 煩惱(번뇌)의 표현일까?
내가 생활하기에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벅차기만 한 서울. 나는 오직 학업에 精進(정진)해 나아가고 다가올 모든 어려움에 대해 즐거운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일 것을 굳게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