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說話(설화)나 傳奇體(전기체)小說(소설)이 아닌 진정한 고대소설이 창작되어진 것은 알려진 한에 있어서 洪吉童傳(홍길동전)부터라고 할 수 있고 우리 글로 지어진 최초의 작품이 된 것이다. 우리 古代(고대) 國文小說(국문소설)은 대개가 지은 사람과 지어진 때를 알지 못하거니와 홍길동전만은 작자와 시대가 분명하다. 또 대개 등장하는 人物(인물)과 사건의 무대가 中國(중국)으로 되어 있으나 이 小說(소설)은 우리나라를 터전으로 삼고, 일어나는 사건도 모두 우리나라 인물로 우리나라 생활 속에서 움직인다.


  1. 內容面(내용면)

  古代(고대) 國文小說(국문소설)은 대게 中國(중국)의 古代(고대) 사실과 한문의 고전문귀, 漢詩(한시)귀절을 너저분하게 인용하고 있으나 이 小說(소설)만은 우리 生活(생활)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토대로 하고 우리말과 우리글로 써 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특징이다.
  洪吉童傳(홍길동전)은 작자 心性生活(심성생활)을 표현하였다기보다, 유교적인 사회제도에 대한 항거로써 쓴 것은 주지된 사실이다.
  따라서 平坦(평탄)한 문학적 배경 속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사회 개혁의 方便(방편)으로써 썼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어떤 目的意識(목적의식)에서 작자의 理念(이념)을 表現(표현)하였던 것이다.
  洪吉童傳(홍길동전)이 花史(화사)나 金鰲新話(금오신화)와 文學上(문학상)으로 판이한 점은 後者(후자)들이 說話(설화)의 허구적인 관념 表現(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면 前者(전자)는 소설적 허구의 사실적 표현이라는데 있다.
  이 작품은 嫡庶(적서)差別(차별) 철폐운동으로 處刑(처형)된 徐羊甲(서양갑), 沈友英(심우영) 등을 ‘모델’로 한 作品(작품)이다. 李朝時代(이조시대)에 있어서 가족 제도와 사회제도의 모순의 하나인 嫡庶(적서)差別(차별)을 主題(주제)로 하고 탐관오리를 징벌, 그들의 不義(불의)의 財物(재물)을 탈취하여 빈민을 구제한다는 政治的(정치적) 社會的(사회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문제의 소설이다.
  그러나 기교나, 手法上(수법상)의 未備(미비)로 이상과 같은 主題(주제)가 具體的(구체적)으로 형상화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作品(작품)이다.
  그러나 당시 作家(작가)들의 수준으로 보아서는 主題(주제)의 대담한 設定(설정) 등이 놀라운 일이다.


  2. 主題面(주제면)

  첫째, 작품은 그 사회의 요청에 의하여 創作(창작)되는 것이다.
  선조, 광해조의 社會相(사회상)은 홍길동전과 같은 小說(소설)의 발생을 충분히 뒷받침 해주고 있다.
  곧 당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적서차별에서 야기된 그들의 社會的(사회적) 지위, 그리고 선각자들의 庶流(서류)에 대한 타파를 불러일으켜 정책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보수적인 대세에 눌려 실패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庶流(서류)의 저항은 점점 높아져 드디어는 七庶之獄(칠서지옥)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되었다.
  둘째, 임란을 전후한 사회의 혼란과 농지의 황폐로 인한 國家(국가)재정의 궁핍은 行役(행역)의 빈번으로 生活苦(생활고)를 가져왔고 거기에 지배자를 자처하는 탐관오리의 가렴주구 때문에 하민층의 因苦(인고)는 날로 더해갔다.
  셋째, 宗法(종법) 사상에서 출발한 差別(차별)이 귀족과 양반들의 지위확보로 발전하여 中國(중국)보다 더 혹심한 신분제 사회를 형성하여 영원히 그들의 任官(임관)을 막게 되었다.
  불우한 지위에 있던 庶流(서류)들의 불평은 축적되고 폭발을 자극하였다.
  넷째, 國祖(국조)의 토지개혁이 공신전과 科田(과전), 그밖에 別田(별전)의 증대로 말미암아 특정인에게 토지의 소유가 넘어가고 정작 농민은 土地(토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생산력의 감소는 국력의 약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다섯째, 朝鮮(조선)사람의 해외진출을 장려하고 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主題意識(주제의식) 밑에서 쓰여진 것이면서도 작자가 의도하였던바 주제나 그의 사상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표현상의 기교가 부족하였다고 밖에 볼 수가 없겠다.


  3. 社會意識面(사회의식면)

  광해군 이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어 온 것은 홍길동전이 당시의 사회적 실상과 민중의 생활 감정을 반영한 연유인 것이다.
  홍길동전에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당시 社會相(사회상)의 일면은 신분적 차별이다. 이조관서를 아버지로 둔 名門巨族(명문거족)의 아들 길동이 侍婢(시비)를 어머니로 두었다는 이유로 社會的(사회적) 대우와 출세가 거부된다.
  嫡庶(적서)差別(차별)이 심했던 당시에 洪(홍)씨 가문의 떳떳한 일원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서자로써 천대를 받는데 대하여 吉童(길동)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품었다는 것은 당시 양반사회에 존재했던 嫡庶(적서)差別(차별)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허균은 비록 천생이지만 인물이 出中(출중)한 吉童(길동)을 통하여 불공평한 신분제도를 비꼬았던 것이다.
  어쨌든 허균은 신분제도를 조롱하고 비웃음으로써 대다수 민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吉童(길동)은 당시의 통치계급이었던 양반귀족 및 관료에 대한 피치자인 서민대중의 불평불만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洪吉童傳(홍길동전)은 당시의 사회적 신분제도와 政治的(정치적) 無能力(무능력)과 타락을 희롱한 민중의 小說(소설)이며 저항의 소설인 것이다.
  허균이 洪吉童傳(홍길동전)을 쓸 때 國文(국문)으로 썼다는 점을 보거나 당시의 대부분의 소설이 中國(중국)의 古事(고사)를 많이 인용한데 비해 洪吉童傳(홍길동전)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보더라도 그는 민중을 염두에 두고 이 小說(소설)을 쓴 듯싶다.
  作中人物(작중인물)과 배경이 모두 우리나라에 기반을 둔 것을 보더라도 허균은 당시 귀족 계급의 文學的(문학적)사대주의를 벗어난 인물인지도 모른다.
  당시의 귀족생활이 서민 대중 속에 파고들지 못한 연유도 신분계급 간의 생활 감정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서민 세계와 동떨어진 中國(중국)의 古事(고사)를 무수히 인용하고 민중의 生活(생활)言語(언어)와 거리가 먼 漢文文學(한문문학)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洪吉童傳(홍길동전)은 비록 귀족 출신에 의해 형상화된 作品(작품)이지만 서민의 生活感情(생활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서민을 위해 씌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洪吉童傳(홍길동전)에 나타난 社會(사회)意識(의식)은 결코 그 당시의 기본적 가치체계를 근본적으로 뛰어 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즉 혁신사상의 한계성을 이해할 수 가 있는 것이다.
  홍길동은 기존 이념을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새로운 이념을 표방하는 근대적 의미의 혁명가가 될 수 없었으며 또한 당시 사회의 전통적 성격으로 보아 그 이상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오히려 당시 사정으로 보아 허균의 고발은 최대한의 저항적 고발이었음에는 틀림없다.
  허균의 소설이 보여주는 혁신사상은 근대적 혁명사상보다는 전통적인 반란의 저항정신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그가 질타한 것은 관리들의 부정부패였고 양반층 내의 嫡庶(적서)차별이었지 군주제도의 정당성, 신분제도의 당위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공격치는 않은 것이다.
  따라서 허균의 홍길동전을 얼마만큼 체제 부정적이며 신분계급 혁명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허균이 신분제도의 부당성을 노골적으로 공식하고자 했다면 嫡庶(적서)의 대립보다는 班常(반상)간의 대립으로 확대했을 수도 있으며 길동이 어디까지나 양반귀족문중의 庶子(서자)로써 등장한다는 것은 허균의 신분제도 개혁의식이 전사회적 차원에까지 확대하지 않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허균도 전통적인 가치관과 제도를 근본적으로 의심한 것은 아니며 기본질서내의 지나친 부당성만을 고발한 것인 듯싶다.
  이로써 볼 때 홍길동전이 비록 당시의 사회상을 고발한 일종의 저항 문학이라 하더라도 이 소설에 깔려 있는 基底的(기저적) 가치관은 당시의 윤리관을 근본적으로 배척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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