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실로 오랜만에 내리는 비. 겨울이 저만큼 나앉았고, 마른 잔디 사이로 연둣빛 봄이 열려도 비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농촌은 농촌대로, 도시는 도시대로 비를 기다렸다. 새들은 새들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나무도 풀도 목말라 애태웠다.
  오후부터 쏟아지는 빗줄기는 지금 짙은 어둠 사이로 쉬임없이 쏟아진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 금은 흙덩어리 속으로 푸근히 스며들고 있다.
  이런 밤이면, 어느 자그만 도시의 천정이 둥그런 역사(驛舍)가 생각난다. 매표소 창구도 닫히고 마지막 기차도 이미 지나가 버린 늦은 시각, 키가 큰 수은등만이 어둠을 밝히고 섰다.
  음식점이나 술집, 다방을 찾아다니며 껌을 팔던 나이가 어린 소년. 지친 발걸음이 구석진 의자 곁에 와서 머문다.
  겉옷이 빗물에 젖고, 까만 머리털에 빗방울이 맺히고, 외로움이 얼굴에 얼룩져 있다. 가슴 가득 서러움이 꿈틀거려도 끝끝내 말이 없는 소년, 꽉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기다려 줄 사람을, 평온을, 그리움을 잊은 지도 오랜 눈망울.
  질퍽하니 고인 신발 속 빗물에 발가락이 시리다.
  어둔 밤을 적시는 봄비 탓이라고 해야 옳을까? 갑자기 어린 소년이 되어 울음을 참아내지 못하는 나는.
  참 인생은 적당히 사는 게 아니라고 했었다. 더더구나 문학(文學)은.
  어둔 하늘 밑을, 밤비 맞으며, 소년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
  살아온 나날보다 살아갈 나날이 더욱 많은 그 까닭을 껴안고, 내딛는 발걸음이 자꾸만 무겁다.
  암회색 비안개가 발등에 덮이고, 오한이 뼈 속에 사무치고, 돌부리에 걸려 세 번씩이나 넘어져도 소년은 계속 걸어 나간다. 아니, 걷지 않으면 안 된다. 외투 없이 보내야했던 저 난간 겨울의 가난을 씻어주는 햇살이, 따스하게 이마를 만져주는 한 순간의 경이로움을 져바릴 수가 없듯.
  부풀어 오르는 먼 강물의 물결소리를 아득히 느낀다.
  새벽이 가까워지면서부터 차츰씩 빗소리도 낮아진다.
  이 비가 그치면 온 밤을 어둠과 맞서서 걸었던 소년의 눈앞에 봄은 소리 없이 다가설 것이다.
  개나리의 샛노란 꽃망울 사이로, 암회색 안개와 오한과 돌부리의 아픈 밤을 기억하게 되리라.
  그 기억은 눈부시지 않은 빛남으로 스스로를 달래는 소망되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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