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統藝術(전통예술)에 대한 再發見(재발견)

  ○…現代(현대) 前衛藝術(전위예술)은 ‘다다’에 直接的(직접적)인 기원을 가진다. ‘다다’는 第一次世界大戰(제일차세계대전) 중 戰爭(전쟁)을 불가피케 한 産資業本主義(산자업본주의) 世界觀(세계관)과 進步(진보)의 迷妄(미망)에 對(대)한 藝術家(예술가)의 反逆(반역)運動(운동)이었으며 그것은 一切(일절)의 旣存(기존)美學(미학)에 對(대)한 철저한 파괴로 表現(표현)되었다.…○

  ‘다다’의 직접적인 계승이라 할 초현실주의 역시 빈곤과 부유의 양계 평화의 福音(복음)을 외치면서 여전히 침략전쟁을 전개하는 人間(인간)의 각종 충동을 억압함으로써 僞善(위선)으로 내놓는 ‘리이드 부르주아’의 허위와 道德的(도덕적)인 부패에 대한 거부 반응이었다.
  抽象主義(추상주의)나 ‘앵포르멜’ 繪畫(회화)만 하더라도 戰後(전후)의 實存的(실존적) 상황을 확대하려는 創造(창조)의 몸부림이었다. 이처럼 前衛藝術(전위예술)은 社會的(사회적) 긴장이나 위기의식에서 비롯할 때도 있고 단지 藝術(예술)內的(내적)일 경우도 있지만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그것은 이미 硬化(경화)된 藝術觀(예술관)의 常套性(상투성)을 타파하고 인간의 새로운 存在(존재)秩序(질서)와 感性(감성)의 地平(지평)을 열어 보이려는데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本質的(본질적)인 의미에서부터) 革命的(혁명적)이다. 이 혁명성은 反對(반대)側(측)에서 보면 기존 질서에 대한 위협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퇴폐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지금까지의 前衛藝術(전위예술)이 긍정적인 面(면) 보다는 否定的(부정적)인 面(면)이 問題(문제)시 되고 또 퇴폐예술로 받아들여졌던 것도 이와 無緣(무연)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낡은 觀念(관념) 때문이다. 질서를 파괴한 대신 무엇을 제공했는가에 대해 반문해야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전위일수록 전위의 역할이 끝날 때 前衛(전위) 아카데미즘이 되었던 사실을 상시할 필요가 있다. 전위의 革命性(혁명성)은 創造(창조)의 활력과 獨創性(독창성)을 전제로 한다. 반면 일반대중의 藝術(예술)感覺(감각)은 언제나 保守的(보수적)이다. 이 양자 간의 不一致(불일치)가 前衛藝術(전위예술)을 부정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 경우 전위예술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대중이 예술감각이나 미적 감수성을 부단히 更新(갱신)시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다. 더구나 대중을 어떠한 이데올로기 또는 政治的(정치적) 目的(목적)에 강제하려 할 때 統治權(통치권)이 대중의 보수성을 이용함으로써 전위예술을 거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 날‘나치스’ 政權(정권)이 당시의 전위 예술가들을 社會(사회)革命(혁명)의 同盟者(동맹자)로 받아들였다가 추방한 다음 오히려 ‘부르주아 아카데미즘’의 상투형으로 흘러간 적이 있다. 獨創的(독창적)인 예술은 우리의 感性(감성)을 확대케 함으로써 人生(인생) 그 자체를 更新(갱신)시키려는데 비해, 비약한 예술은 감정을 타락시키며 감정의 타락을 독재자나 민중 선동가가 이용하는 요인임을 고려할 때 참된 意味(의미)의 前衛藝術(전위예술)이 인간이나 사회에 이바지 하는 바가 어떠한지는 명백하다.
  藝術(예술)이 특정한 인간이나 目的(목적)을 위해 봉사하지 않아도 좋은 社會(사회)가 출현했을 때 그것은 이미 前衛的(전위적) 성격을 잉태했고 또 그러한 社會的(사회적) 풍토에서만 전위예술은 生存(생존)할 수 있고 代價(대가)를 따져 볼 수 있다. 韓國(한국)에서 前衛藝術(전위예술)이 하나의 운동으로 등장한 것은 1950년대말 抽象主義(추상주의) 및 앵포르멜 繪畫(회화)가 그 始初(시초)다. 그것이 비록 西歐(서구)戰後(전후)樣式(양식)의 수입이란 약점에도 불구하고 市民權(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종래의 아카데미즘을 타파하고 표현의 영역을 확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의 일련의 전위예술은 사실상 空轉(공전)한 감이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現實性(현실성)에 밀착하지 못함으로써 反逆(반역)의 목표나 應戰力(응전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一部(일부)에서는 전통 예술과의 活潑(활발)한 접촉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전통 거부라는 전위 본래의 論理(논리)에 어긋난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近代(근대)藝術(예술)이 西歐(서구)藝術(예술)의 세례를 받는 동안 전통으로부터 一時的(일시적)으로 단절되었던 사정에 기인한다. 傳統藝術(전통예술)에 대한 再發見(재발견)이다. 그와의 접촉을 현재로서는 실험적인 性格(성격)을 띠었는데 그러한 경향을 우리예술의 脫(탈)西歐化(서구화)를 위해서나 전통의 긍정적 계승을 위해서나 感性(감성)의 확대의 경신을 위해서도 응분의 당위성을 지닌다. 비단 이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 예술에 創造(창조)의 活力(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서는 기왕의 前衛藝術(전위예술)에 대한 반성과 함께 보다 폭넓고 다양한 실현이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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