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時代(현시대)는 現實(현실)과 狀況(상황)의 관련양상

  現代詩(현대시)에 관한 최근의 많은 논의는 누가 어떻게 이야기하더라도 크게 두 개의 범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現實(현실)과 歷史的(역사적) 狀況(상황)과의 관련 양상으로서 詩(시)를 평가하고 이해하려는 쪽이며 다른 하나는 이와는 역방향에서 모든 시 이외의 現象(현상)을 거부하려는 쪽이 그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개의 태도의 저쪽에는 역시 상이한 각자의 詩的(시적) 態度(태도)(Poetie attitude)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가 우리의 삶을 사회와 역사에 대한 연속개념으로 파악하면서 個人(개인)을 歷史(역사)와 社會的(사회적) 次元(차원)으로 끌어올리려고 한다면 후자가 거느리는 거점은 언제나 個人(개인)이며 個人(개인)만이 절대적이고 신뢰할 수 있다는 개념에 서고 있다. 말하자면 전자가 個人(개인)의 단위를 사회와 歷史(역사)의 意識(의식)地點(지점)으로 환원시키려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모든 現象(현상)을 個人(개인)의 단위로 환원 축소시키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개의 태도 가운데서 어느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냐 라고 할 때 피상적이거나 개인적인 대답이 아니라면 상당한 곤경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 두 개의 상반된 태도가 그 나름의 정당성을 우리 詩(시) 속에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 사실에 있어서도 상당한 자기 나름의 정당성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일찍이 이 두 태도는 50年代(년대) 후반부터 60年代(년대)에 걸쳐서 참여와 순수라는 모습으로 자기를 提示(제시)해 놓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새삼스레 參與(참여)가 좋으냐 純粹(순수)가 좋으냐 하는 문제를 건드릴 뜻은 없다. 다만 내가 문제로 삼으려 하는 것은 우리 詩(시)가 이 두 개의 태도 속에 고착화되는 것을 우려할 뿐이다. 그것은 一次的(일차적)으로 詩史的(시사적)인 의미에서 극복의 문제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詩史(시사)에서 혹은 詩(시)에서 극복이란 무엇인가, 詩(시)가 자기의 生(생)에 있어서 生(생) 자체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문화의 한 형식이라고 한다면 이 극복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이 문제는 詩(시)를 게기적인 시간의 産物(산물)로만 생각한다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오직 詩(시)를 모든 과거성에서 유리시켜 現在性(현재성)만을 가지고 이해할 때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詩(시)를 歷史意識(역사의식)이라는 ‘에리올’적인 命題(명제)에서 이해하려는 태도에 관련된다. 동시에 좋은 작품은 시대에 따라서 상이한 자기의 의미를 획득해가는 사실과도 가깝다. 詩(시) 혹은 文學(문학)은 언제나 現在性(현재성)에 의해 이해될 뿐인 것이다.
  이점에서 文學史(문학사) 혹은 詩史(시사)는 당대에 있어서의 문학의 한 이해방법이며 그것의 集積物(집적물)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시간상의 계기에 의한 제반 文學的(문학적)인 集積物(집적물)을 現在性(현재성)으로 환원시킨다는 것- 그것은 現在(현재)의 삶의 의미로 환원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삶에 대한 많은 방향에서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문학적인 집적물을 현재의 生(생)의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은 과거의 生(생)에 대한 해석 방향을 벗어나서 새롭게 오늘의 해석방향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리라.  
  곧 A라는 방향에서의 生(생)에 대한 한 해석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과거의 것이라면 우리는 똑같은 生(생)을 현재에는 B라는 방향에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방향성이라는 말은 世界觀(세계관)이나 生觀(생관)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아도 좋을 것이다. 또 이 事實(사실)은 단지 시간적인 계기에서 뿐만이 아니라 同時代(동시대)를 사는 現場(현장)에서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한두 사람의 文學人(문학인)만이 아닌 多數(다수)의 文學人(문학인) 한 시대를 공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진술은 의거한다. 그것은 한 시대의 진정한 生(생)이란 한 두 사람의 드러냄이나 해석만으로 가능할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에 관련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다만 문학에서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은 자기 生(생)에 대한 해석이나 이해가 얼마나 그 나름의 深遠性(심원성)이라는 부피를 얻는가 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서 文學的(문학적) 극복내지 詩的(시적) 극복이란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응답이 보다 우리에게 분명해질 것이다. 곧 극복이란 生(생)에 접근하는 A라는 방향에 대한 B라는 방향의 제시 외에 다름 아닐 뿐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A라는 방향성을 이탈하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B라는 방향성을 얻기 위해서는 아픔과 싸움이 처절해야 하며 그것을 예술적 고투라고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참여와 순수란 바로 生(생)에 대한 해석방법의 차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두 가지의 태도를 놓고서 하나는 다른 하나에 대한 극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해서 이 두 가지의 태도가 동시대의 현장에 서있다는 말로서는 이 문제는 해명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두 가지의 태도가 서로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관습이나 도식성을 강요해 오고 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個人(개인)단위와 社會(사회) 단위만이 강요될 뿐이며 生(생)이나 詩(시)는 이 단위데 대한 하나의 방법적인 대응이나 그런 次元(차원)으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生(생)이 언제나 자기를 올바르게 확보하는 것은 이러한 先驗的(선험적) 기준에 매몰되지 않는 생 그 자체의 자유성에서이다. 마찬가지로 詩(시)가 이에 대응하는 하나의 형식인 한 그 형식에 어떤 기준도 세워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先驗的(선험적) 기준이나 그 형식성이 인정될 때 詩(시)나 生(생)은 똑같이 그 틀과 형식에 대한 방법적이거나 그 하위 차원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습관이나 도식성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도식과 습관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구태여 ‘하이데거’의 명제를 빌지 않아도 죽음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참여와 순수가 상호를 극복할 수 없다는 의미는 그 두 가지의 태도가 고착화 된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오늘날의 우리 詩(시)가 이 두 가지 태도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詩(시)에서의 生命力(생명력)이란 무엇인가를 다음과 같은 예로서 說明(설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物理學(물리학)에 ‘보일’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고 하자. 이 法則(법칙)은 ‘보일’에 의해서 그 사실이 실험되고 검증됨으로서 하나의 법칙으로 확립된다. 그리고 그 실험과 검증은 하나의 절차체계와 형식방법론을 이룬다. 이 법칙이 이상과 같이 자신을 확립시킨 이상 세상의 누구나 다 같은 ‘보일’의 법칙이나 결과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곧 ‘보일’의 절차체계와 형식방법론을 따를 때 그것은 곧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과학 혹은 물리학에서의 진리이다.
  문학에 있어서는 같은 절차체계나 형식방법론에 의해서 동일한 결과를 얻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점에서 과거의 문학이 훌륭한 성과를 달성했다고 해서 오늘의 문학이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 과거의 문학이 얻은 성과를 되풀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문학의 특색이나 그 生命力(생명력)은 드러난다. 어떠한 절차체계나 형식방법론으로 되풀이할 수는 없는 것- 그것이 문학의 본질이자 생명력인 것이다. 곧 우리의 生(생)이 언제나 독특하고 다양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도 독특하고 다양한 것이며 그것에 의해서 어느 시대고 문학은 필요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발언에 설 때 나는 앞에서 말한 커다란 우리 詩(시)의 두 가지 태도가 하나의 도식성으로 강요되는 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어떻게 극복되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그렇다. 또 ‘어떻게’라는 말을 쓸 수도 없을 것이다. 극복한다는 일이나 그 방법론을 설정해 놓고 있을 때 그것도 자칫하면 앞에서와 같은 고착화를 되풀이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가능할 것인가.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을 아직 가지지 못하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이 있다면 生(생)이나 詩(시)나 다 같이 하나의 더듬이로서 그것을 지고 가는 자의 온몸이 있다는 사실 뿐이다. 온몸을 열어놓고 生(생)과 詩(시)에 대응하고 싸우는 것만이 현재로서는 옳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자기 詩(시)와 生(생)의 미래를 감히 책임 질 수 있을 것인가.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