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서 T.S.엘리어트가 말한 ‘잔인한 달’은 그가 말한 이후 몇 번이나 사월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그 어의가 좀 쇠미해져가는 느낌이다.
  정신적으로 죽어버린 영혼 없는 무기력한 인간들이 맞는 약동의 계절은 냉혹하리만치 잔인하리라던 그 사월!
  그 사월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한다. 휴강을 외치는 느릿하고도 조금은 비굴한 목소리가 우리를 유혹하고, 또 5교시의 나른한 춘면이 우리를 유혹하고, 친구와 마시는 차 한 잔의 풋냄새 나는 철학이, 선배가 권하는 막걸리의 냄새가, “명상록”이나 “니이체”보다는 얄팍한 주간지가, “어린왕자”나 “갈매기의 꿈”보다는 천연색의 잡지가 우리를 더 유혹한다. 그리고 D극장에서는 ‘딘’이 부르고, H다실에서는 백원짜리(?) 미팅이 부르고, 또 어느 곳에선 사이키한 전자음향이, 그보다 먼 곳에서는 달콤하나 결국은 쓰디쓴 것들이 우리를 한도, 끝도 없이 유혹해낸다.
  그리하여 사월은 죽어간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가지고- 버스 속에서 발등을 짓밟히는 아픔이, 가난한 이웃을 모르는 높고도 견고한 성안의 사람들이 우리를 화나게 한다.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의 십대가, 이십세의 늙어가는 젊은이가, 키 작은 중학생의 무거운 가방이, 십삼층 건물 위의 낮은 하늘이, 흙냄새 없는 건조한 페이브멘트가 우리를 화나게 한다.
  그러나, ‘내가 설 땅은 어디냐?’를 한번쯤은 외치는 우리에게- 특히, 푸렛쉬맨에게- 4월은 무엇인가를 주고 있다. 푸른 신록 속에서, 어린이의 눈동자 속에서, 소년의 불끈 쥔 작은 주먹에서도, 젊은이가 발하는 예지 속에서, 책임감 있는 사람들의 행동 속에서, 그리고 우리들 속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찾게 해주고 있다.
  살아온 날보다도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우리는 쉼이 없이 도전하는 사월 속에서 지나온 날을 돌아보며 실책을 미워하고, 내일을 부르며 희망을 찾아서 ‘용맹정진’ 할 수 있는 힘과 사명과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리라.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