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큰 大(대)자 하나 따기가 이처럼 힘 드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저의 합격의 영광을 아버님께 돌려드립니다” 맨 처음 합격증을 받아 쥐고 마치 풍랑을 만난 조각배 마냥 뛰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애써 뱉은 말 한 토막이다. 하지만 내 얼굴에 나타나는 2차함수의 곡선-고진감래라는-과 아버지 얼굴에 그려지는 2차함수의 그래프-흥진비래라는-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두 곡선의 교차점에서나마 잠깐 아버지와 자식사이에 ‘기쁨’이라는 공감이 있었을 뿐 역시 아버지와 아들은 달랐다. 집이 돈 찍어내는 곳이 아닐 바에야 집안형편으로 기십만원을 준비한다는 건 합격의 기쁨을 송두리째 빼앗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사정은 나 혼자만의 애로는 아니었을 거라 생각되지만 말이다. 결국 나는 지금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다. 무엇의 결과인가? 나의 뒷바라지에 뼈를 깎아내는 듯한 부모의 고통이 있었다. 1차 시험에서 낙방한 자신의 가슴 아픈 순간들의 극복과 주위의 손가락질에 대한 비장한 각오, 시험 전 보름동안은 지금 생각해도 기막힌 초지일관의 도전이었다.
  어릴 때는 어쩌면 그렇게 서울을 동경했던가?
  멱 감던 시내만큼이나 길게 보이던 기차-서울 다닌다는-가 어쩜 그렇게 신기하게만 보였던가? 어쩌다 이불보따리만한 큰 가방을 든 예쁘장한 서울 손님이 올 때면 종일토록 따라다니며 얘기라도 붙여보고 싶었던 게 그때 심정이었으리라. 워낙 친척도 아는 친구도 없는 서울인지라 올 수 있는 길이 막힌 채 초․중․고의 12년 동안 학교생활을 하다 보니 뾰족한 수가 생기긴 했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 시험을 치는 기회에다 모험을 거는 것이었다. 그러나 中(중)3때 놀아버린 탓에 한번 기회를 놓쳐 대학교 입시에는 꼭 가보리라고 얼마나 다짐해 왔던가? 물론 대부분의 대학이 다 서울에 있으니까 서두르지 않아도 올라오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하여튼 쌓이고 쌓인 다짐이 노력으로 바뀌어져 1차에 응시차 서울에, 말만 듣던 서울로-해마다 이처럼 봄만 되면 신문지상의 사회면에 랭킹을 다루는 시골 청소년들의 무작정 상경기사의 본 고장이기도 한-올라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관광 여행이 아니었던 바에야 쏘다닐 수 없어 하숙방 구석에서 며칠 동안 갇혀야 했다. 입시 치르는 날 그 많은 사람들 틈에 끼인 일개 촌뜨기인 나는 그래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 대열에 끼었다는 자부심도 있었지만 일찍이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홍수에 어지간히 겁을 먹은 건 당연지사였다. 물론 이게 낙방의 이유가 된 건 아니지만 거기서나마 서울의 일면을 보고 놀란 토끼눈 신세를 면치 못했으리라. 예(古(고))같으면 과거나 다름없어 집에선 큰맘 먹고 올개쌀 팔고 보리밥 먹을량 치고 쌀도 좀 팔고 사돈 8촌까지 더듬어 아는 집은 다 찾아 꾼 돈으로 여비를 챙겨 서울로 보낸 보람도 없이 낙방의 소식을 들은 부모님과 날 아는 이들은 실망과 절망을 넘어 아마 죽을 지경이었던 모양이다.
  혹시 붙었더라면 이웃네 돼지 두어 마리는 잡았을 테지만 다행히 낙방의 덕으로 애잔한 돼지 목숨 건져냈으니 이 또한 불교의 자비가 아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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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아미타불大(대)니, 목탁과니, 취직 못하면 시주하러 오라는 등 주위에서 한번쯤은 들려오는 들어본 적이 있는 불명예도 불구하고 평소 뜻대로 東國大(동국대)를 지망 기어이 2월 15일 파란게시판에 붙은 못난 이름 석 자를 발견하고 얼마나 흐뭇했더냐!
  세상에 떠도는 말에 ‘못 살아도 내 낭군 잘 살아도 내 낭군’이란 말이 있다.
  자기가 있으므로 해서 인생이 있고, 세계가 전개 되는 한 자기 존재야말로 삼라만상 가운데 으뜸이 아니랴. 내 집, 내 학교, 東國人(동국인)이 곧 最高(최고)요 일류이지 다른 것은 이제 생각 밖이다. 이것이 결코 위선으로 엮어진 자위가 아님을 5천 동국인에게 호소하는 바이다.
  며칠 전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올 때 플랫폼에서 아버지께서 이르신 말씀 한 구절-일류 대학만이 일류 인간을 만드는 건 절대 아니다-라는 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진리에 동의한지 이미 오래다.
  이제 남은 건 무한한 가능성의 제시로 말미암아 자신을 기꺼이 던질 수 있는 이 지성과 낭만의 광장에서 동국 중흥의 한 건설자로서, 편협한 지식인이 아닌 투철한 지성인으로서 사명을 다하는 일 뿐이리라. 아울러 이제까지 찌든 맘일랑 날려버리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서울 구경을 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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