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童詩(동시)를 中心(중심)으로-

<1>

  우리가 兒童文學(아동문학) 장르에 속하는 作品(작품)들을 접할 때면 간혹 아동문학의 한계성을 느낄 때가 있다.
  아동문학의 本領(본령)은 어린이의 心領(심령)에 言語(언어)를 심어 풍성한 心領(심령)의 결실을 채찍질하는 文學(문학)의 한 장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成人文學(성인문학)과 兒童文學(아동문학)의 한계성을 논하게 된다.
  몇 마디의 詩語(시어)(童詩(동시))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에 그 한계를 초월한 예가 허다하며, 때문에 兒童文學(아동문학)에 있어서의 言語(언어)問題(문제)는 항상 정확한 이해로 選擇(선택)이 있어야 한다.
  아직도 ‘영이’와 ‘바둑이’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土俗的(토속적)이기는 하지만 요즈음처럼 급템포로 변하고 있는 세상에 어린이들의 生活(생활)도 항상 변모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童詩(동시)에 있어서의 변모는 詩語(시어)選擇(선택)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히 어긋난 表現(표현)은 아니다. 어린이들은 새롭고 감각적인 면에 흥미를 더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방면에 치중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아동문학도 消減(소감)狀態(상태)에 있다고 누가 부정하지 않겠는가.
  改革(개혁)이란 “旣存(기존)體制(체제)의 완전한 변혁이나 또는 기존상태에 대한 새로운 사실의 첨가나 삭제를 통한 부분적인 변혁, 이 두 가지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라고 美國(미국)의 유력한 교육기술지의 헨리.J.오토 교수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아동문학도 기존상태의 첨가가 시급히 요청된다고 볼 수가 있다.


<2>

  1930년대 尹石重(윤석중)씨의 ‘빨간 댕기’이후 우리의 童詩(동시)도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4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尹石重(윤석중)씨의 동요․동시를 읽으며 어린이들은 성장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에게 큰 位置(위치)를 차지하고 있나 엿볼 수 있는 반면, 또 다른 면으로는 우리의 동시가 아직도 민요조의 형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實證(실증)도 된다.
  그러나 1960년 초에 몇몇 시인들이 동시에 참여해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계기가 있었다.
  말하자면 ‘童詩人(동시인)同人會(동인회)’의 탄생이 바로 이러한 계기를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가 있다.
  여기의 멤버가 崔啓洛(최계락)․曺有路(조유로)․朴敬用(박경용)․劉庚煥(류경환)․筆者(필자) 등으로 成人(성인)詩壇(시단)에서 童詩壇(동시단)에 대거 참여하고 부터이다.
  이들은 소위 謠的(요적)인 童詩(동시)를 繪畵的(회화적)인 童詩(동시)로 변모시켜 보자는 일련의 작업을 했다.
  다시 말하면 재래의 동요․동시의 탈을 벗기고 새로운 詩(시)의 가능성을 포착해 보자는 한결같은 노력이 여실히 들어나 있다.
  이들의 작업은 당시 아동문학계에서 난해시의 제거운동이 벌어질 정도로 새로운 바람을 휘몰고 왔다.

  반짝이는 새벽별, 누가 먼저 보았나?
  동틀 때 아가씨가 물을 깃다가
  우물물에 비친 별, 먼저 보았지.
  -중략-

  위의 작품은 尹石重(윤석중)씨의 ‘새벽노래’란 동시인데, 다음의 작품은 朴敬用(박경용)씨의 ‘빈 가지에’란 작품의 앞부분이다.

  빈 가지에
  참새들이 모여 앉아
  열매 되었네.
  움직이는 열매.
  -중략-

  尹(윤)씨에 비해 朴(박)씨의 작품은 얼마나 감각적인가. 톡톡 쏘는 맛과 詩的(시적)인 면은 확실히 童詩壇(동시단)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3>

  다음으로 敎育(교육)公害(공해)를 들 수가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흘러나오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CM‘송’주제가, 아니면 학교나 가정 근처에서의 만화가게 등은 올바른 兒童文學(아동문학)의 성장을 저해하고 있고 또한 어린이들을 시들게 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어린이어야 하는데 빨리 어른이 되어서도 안 되며 어른같이 흉내를 내어서도 안 된다.

  ‘어린이는 어른의 싹이요, 秀才(수재)는 士夫(사부)의 알이니, 이때 만일 火力(화력)이 모자라고, 단련이 서투르면 뒷날 세상에 나아가 朝廷(조정)에 설 때, 마침내 훌륭한 그릇을 이루기가 어려우리라.’

  中國(중국)의 采根譚(채근담)에 위와 같은 유명한 말이 있다.
  확실히 그렇다. 어릴 때 마음의 詩心(시심)을 잘 심지 않고는 올바른 성장을 기약할 수가 없다.
  바로 여기에서 아동문학의 중요성을 피력할 수가 있다.
  이솝의 우화나 안델센의 동화나 타골의 詩(시)들이 한결같이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생산했다는 것은, 당시 어린이들은 행복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꿈을 잃지 않고 환상의 세계로 이끌고 가야 할 우리 문학인들은 어린이들에게 반드시 꿈을 불어넣어 줄 의무가 있다.
  나날이 늘어가는 사회의 범죄나 사회의 부조리를 어른도 모르게 어린이들의 마음에 번져간다면 앞으로의 이 나라는 어떻게 되겠는가?
  앞으로 더욱더 유능한 작가나 시인이 아동문학에 참여하여야 하고, 국가나 가정에서도 올바른 작품을 어린이들에게 읽히는 풍토가 하루빨리 와야 할 것이다.
  타이틀만 아동문학이라는 간판을 앞세우고 만화보다 더 저질인 작품을 펴내지 말고 어린이들에게 참으로 재미있고 유익한 작품을 생산해서 읽힌다면, 문학 중에 으뜸가야 하는 아동문학도 머지않아 활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현대아동문학도 사실은 그 본질의 역할을 못하고 있는 실정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어린이도 어른도 노인도 함께 읽어서 동심을 찾을 수 있는 그러한 작품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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