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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3 19:23

동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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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동대문학상]희곡‧시나리오 부문 장원안녕, 단무지

인물
성태(33)
경현(30)
하람(6)

무대
고층 아파트의 제일 꼭대기 층, 천오백삼 호.
거실은 그린과 화이트 계통의 인테리어들로 아늑하게 꾸며져 있다.
개 중 작은 방. 거실과는 달리 핑크 톤의 벽지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전면으로 바깥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문이 눈에 띄지만 그것뿐이다.
가구 하나 없이 휑한 방 안에는 여러 개의 큰 상자들만 놓여 있다. 상자 안에는 아이의 옷가지들과 장난감, 앨범 등이 담겨 있다.

*

늦은 밤.
작은 방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만삭의 경현. 달 한 쪽도 떠 있지 않은 캄캄한 하늘이지만 그녀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줄곧 머물러 있다.
그녀의 뒤로는 성태가 박스로 물건들을 옮겨 담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힘들어하고 귀찮아하기 보단 어딘가 모르게 설레고 흥분 된 표정.
박스 하나가 가득 찼는지 뚜껑을 닫아 현관 앞으로 내다 놓고 들어오는 성태. 그 와중에도 경현은 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있다.

경현 안 보여.
성태 그랬잖아. 아무 것도 못 볼 거라구.
경현 보고 싶은데…….
성태 눈 오거든 산책 나갔다 올까? 기적이도 좋아할 거야.
경현 (가만히 고개를 젓는)
성태 오늘은 종일 이렇게 앉아만 있었어?
경현 응.
성태 힘들어도 조금씩 움직여줘. 그래야 순산한다잖아.
경현 …기다리고 있었어.
성태 (피식 웃으며) 전화를 하지. 그럼 좀 더 서둘렀을 텐데. 실은 집에 오는데, (바지 주머니에서 손 싸개를 꺼내 보여주며) 이게 눈에 너무 밟히지 뭐야. 우리 기적이가 하면 예쁘겠지?
경현 (쳐다보지도 않고) 언제 볼 수 있을까?
성태 (검지와 중지에 손 싸개를 해 보며) 내 생각엔 토요일에 나올 것 같아. 우리 기적이는 효자니까 아빠 쉬는 날에 나올 거야. (경현의 배를 안으며) 그치, 기적아? (사이) 대답 없어?
경현 …….
성태 기운이 없어 보인다. 출산일이 다가 와서 그런가?
경현 큰집에는 언제 가?
성태 (시큰둥하게 다시 정리하며) 내일 출근하기 전에 잠깐 들르게.
경현 같이 갈까? 짐도 많은데.
성태 안 돼. 무리하면. 애가 한 번 놀란 적이 있어서 조심해야 된다고 엄마 하시는 말 듣지도 못했어?
경현 차 안에만 있을게.
성태 내일은 집에 데려다주고 갈 여유도 없어.
경현 그럼 퇴근할 때 데리러 오면 되지.
성태 그 집 식구들도 일 있어서 다 나갈 텐데 혼자 뭐하게.
경현 하람이 있잖아.
성태 …너는 그 애가 보고 싶니?
경현 그럼. 우리 딸인데.
성태 나는 빼주라.
경현 여보.
성태 그만해.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지끈거려.
경현 내 잘못이라고 했잖아.
성태 걔한테 문제가 있는 거야. 쪼그만 게 어디서 막 돼 먹은 것만 배워가지고.
경현 그것도 우리 잘못이야.
성태 그래. 우리 잘못이지. (인형 들어 상자에 넣으며) 애초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경현 (창에 비친 인형 보고) 그건 그냥 두자.
성태 뭐하려고.
경현 두고 싶어.
성태 똑같은 걸로 하나 사다줄게.
경현 (상자에서 인형 꺼내며) 하나 밖에 없는 거야.
성태 팬시점에 가면 많아.
경현 이거 하나만. 응?
성태 (꾹 참으며) 하나만, 하나만 한 게 벌써 몇 갠 줄 알아?
경현 어차피 도로 가져올 거잖아.
성태 (빼앗으며) 그래. 그러니까 지금은 좀 참아.

성태, 화가 난 모양인지 입을 꾹 다물고 박스에 짐을 옮겨 담는다.

경현 화낼 일이야?
성태 당신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경현 여보. 그냥 인형일 뿐이잖아.
성태 (단호하게) 두고 싶지 않아.
경현 나중에는 어떡하려구?
성태 기적이 태어날 때까지만 그렇게 하자구. 응?
경현 …못 미더워.
성태 그래도 별 수 없어.
경현 (새끼손가락 내밀며) 약속 해.
성태 어제도 했고, 그제도 했다.
경현 그러니까 해.

성태, 경현의 성화에 못 이겨 대충 손가락을 걸었다 뗀다. 그리곤 다시 짐 정리.

경현 (눈치 보며) 있지.
성태 대답 안 해줄 거야.
경현 하나만.
성태 안 돼.

시무룩하게 창밖을 내다보는 경현, 다시 침묵을 지키면 성태, 그런 모습이 신경 쓰이는 듯 일손을 놓는다.

성태 잘 있어.
경현 (바라보는)
성태 그거 물어보려고 했던 거잖아.
경현 알고 있었네.
성태 오늘은 왜 안 묻나 했다.
경현 …어땠어, 그날? 표정이라든지…
성태 내려주고 바로 오느라 못 봤어.
경현 가는 길에는?
성태 운전하느라 못 봤어.
경현 …….
성태 (한숨 나오는) 괜찮았어. 괜찮다고 했고.
경현 물어 봤어?
성태 응.
경현 정말 괜찮댔어?
성태 안 괜찮을 일이 없잖아.
경현 그날 많이 추웠을 거야. 옷을 든든히 입혀서 보냈어야 했는데…
성태 잊어 버려.
경현 …내 잘못이었어.
성태 애들은 다 그러면서 크는 거야.
경현 정말 나가버릴 줄은 몰랐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는데……. 하람이도 알까?
성태 몰라도 할 수 없지.
경현 알아야 돼. 그래야 돌아올 때 쉬울 거야.
성태 이해 못할 거야.
경현 …맞아. 아직 다섯 살 밖에 안 된 아이니까.
성태 이제 그만 하고 기적이 생각만 해. 엄마 신경이 온통 다른 데 가 있는데 애가 기분 좋게 나올 수 있겠어?
경현 편지를 쓸까?
성태 주경현.
경현 참. 아직 글을 못 읽지. 아! 영상 통화를 해야겠다. 우리 하람이도 엄마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
성태 너 정말 이럴래?
경현 …놀이터 가고 싶다고 조르는데 피곤하다고 매정하게 뿌리쳤어. 사실 피곤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랬는지 몰라. 떡볶이라도 해줄 걸…….
성태 충분히 했어.
경현 (힘없이 웃으며) 같이 수제비도 해먹기로 했어. 텔레비전에 엄마랑 아이랑 나와서 조물조물 수제비 반죽하는 게 그렇게 좋아 보였나봐.
성태 (울컥해서) 그만 하라고!
경현 여보.
성태 우리 아이만 생각해.
경현 하람이도 우리 아이야.
성태 널 위해 잠시 다녀간 아이일 뿐이야. 난 자식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경현 당신도 예뻐했잖아.
성태 어버버버 할 때나 그랬지.
경현 근데 왜 데려오라고 했어?
성태 나도 후회해. 이렇게 생길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버텨볼 걸, 괜한 죄책감 때문에…….
경현 결국… 나 때문이다?
성태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경현 그럼?
성태 우리 애 앞에서는 좋은 얘기만 하자.
경현 …….

사이

성태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귤 좀 가져다줄까?
경현 배불러.
성태 혼자 무슨 맛있는 걸 먹어서.
경현 안 먹었어.
성태 아무 것도?
경현 응.
성태 뭐라도 좀 먹어야지.
경현 헛배가 부른 느낌이야.
성태 (다가와 손 주물러주며) 점심 먹은 거 체한 거 아니야?
경현 안 먹었는걸.
성태 아침은?
경현 종일 아무런 생각도 안 나.
성태 그래도 뭘 좀 먹어야지.
경현 싫어.
성태 애 생각해서라도 먹어야 돼. 잠깐 있어. 죽이라도 끓여 올게.

성태, 서둘러 부엌으로 향한다.
홀로 남은 경현.

성태 (소리) 밥 어디 있어?
경현 못 넘길 것 같은데…….
성태 (소리) 냄새 맡고 나면 또 달라질지 모르잖아.
경현 냉장고 윗칸에 보면…
성태 (소리) 아, 찾았다. 조금만 있어. 맛있게 해줄게.

사이

경현 여보.
성태 응?
경현 구름이 언제쯤 걷힐까?
성태 눈도 아직 안 왔는데, 뭘.
경현 오긴 할까?
성태 날씨가 그렇잖아. 포근한 게.
경현 내일은 맑겠지?
성태 날씨는 왜 자꾸?
경현 …기적이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성태 뭐?
경현 (나지막이) 단무지.
성태 뭐라구?

경현, 잠시 사색에 잠긴다.

하람 (소리) 엄마!

경현의 곁으로 어린 하람이 다가온다. 한 팔에는 인형을 안고 있는데 조금 전 성태와 경현이 실랑이를 벌였던 그 인형이다.

하람 (창밖 내다보며) 에이, 오늘은 없네?
경현 별 보는 거야, 우리 하람이?
하람 엄마. 단무지 못 봤어?
경현 단무지?
하람 응. 토끼가 먹다가 걸어놓는 거. 오늘은 다 먹었나.
경현 토끼? 얘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람 에이. 바보. 모르면 아빠한테 가서 가르쳐 달라고 해.
경현 아빠?
하람 응. 맨날 저기 걸려 있는 거 있잖아. (창 밖 보고) 어! 나왔다! 오늘은 하나도 안 먹었네. 자장면을 안 먹었나.
경현 …달?
하람 단무지. 엄마는 모르는구나?
경현 아빠가 저게 단무지래?
하람 응.
경현 내 이 인간을! 저건 달이야, 하람아.
하람 …아니야. 아빠가 단무지랬어.
경현 하람이 놀려주려고 장난한 거야.
하람 그래도 싫어. 단무지 할 거야.
경현 너 자꾸 그럼 나중에 친구들한테 놀림 받는다. 바보라고.
하람 엄마 나빠! 아빠가 나한테 바보라고 하면 막 화내면서 왜 엄마는 나보고 바보라고 해?
경현 아니. 나는 그런 게 아니라…

하람, 심통 난 얼굴로 방에서 나가버린다.
크게 한숨짓는 경현.

성태 (소리) 심심하지 않아? 음악이라도 좀 틀어줄까?
경현 아니.

프라이팬에 무언가 볶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서히 방안으로 스며드는 음식 냄새. 그 냄새에 경현,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한다.

경현 여보. …여보!

성태, 요리하는 데에 정신이 팔렸는지 경현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가는 경현, 냄새가 역한지 손으로 코를 막는다.

경현 여보!

요리하던 소리 멈추고 황급히 경현에게로 오는 성태.

성태 왜 그래? 안 받아?
경현 (성태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냄새 나.
성태 (멈칫 물러서며) 아, 미안.
경현 창문부터 좀 열어 줘.
성태 고기 넣는 걸 깜빡해서 따로 볶느라고.
경현 그만 해. 아무래도 못 먹을 것 같아.
성태 고기는 아직 안 넣었어. 끓이고 있으니까…
경현 안 먹을래.
성태 조금이라도 먹어. 기적이 생각해서.
경현 (사이) 나는?
성태 당신, 뭐?
경현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성태 너도 기운 차려야지. 산모가 건강해야…
경현 것 봐. 또 아이 걱정.
성태 이게 어떻게 아이 걱정이야. 네 걱정이지.
경현 당신 머릿속엔 온통 이 아이 밖에 없어. 어떻게 하면 아이 방을 잘 꾸밀까, 무얼 먹여야 조금 더 건강하게 태어날까, 어떤 음악이 정서 안정에 도움이 될까.
성태 아빠라면 당연히 생각해야 되는 것들이잖아.
경현 아빠라면?
성태 그래. 좋은 것만 해주고 싶은 마음. 당신도 그렇잖아.
경현 그럼 하람이한테는?
성태 …가스 불 끄고 올게.
경현 당신은 아빠 소리 할 자격 없어.
성태 나도 할 만큼은 했어.
경현 당신이 뭘 했는데?
성태 같이 티비보고, 밥 먹고, 장난감 사다주고.
경현 그런 건 누구나 해.
성태 남도 키우기 힘들다고 버린 자식이야. 그만큼 했으면 됐잖아.
경현 (울분을 토해내듯)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아빠 신문부터 챙기던 아이였어. 슈퍼 가면 자기는 먹지도 않으면서 아빠 좋아하는 오징어땅콩 먼저 골라 집던 아이였고, 문소리만 나면 자다가도 달려 나가던 아이였다구.
성태 그래봤자 남이야.
경현 …그래서 단무지라고 했어?
성태 무슨 소리야?
경현 달 보고 단무지라고 했다며.
성태 내가?
경현 …생각도 안나?
성태 그런 적 없어. 아마 농담처럼 흘린 말이었을 거야.
경현 그 한 마디 때문에 하람이한테는 달이 없어.
성태 나중에 크면 알게 되겠지.
경현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
성태 그럼 좀 특별한 선물을 준거라고 해두자.
경현 (헛웃음 지으며) 특별한 선물? 그런 특별한 선물이면 우리 아이한테도 줘야지. (배를 어루만지며) 아가,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멋있는 걸 보여줄 테니까.
성태 잘못 배운 건 걔야. 왜 애꿎은 애한테 그래.
경현 우리아이는 잘못 가르쳐줘도 똑바로 배울 거야. 똑똑한 아빠를 닮았을 테니까.
성태 유치하게 자꾸 이럴래?
경현 그날도 그것 때문이었어!
성태 뭐?
경현 단무지 보겠다고 대낮부터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싫었어. 그래서 나가라고 했어. 꼴 보기 싫다고.
성태 또 그 얘기!
경현 것 때문에 우리 하람이가… 우리 딸이…….

답답함에 나가버리는 성태.
죽이 끓던 소리가 그치고,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 물소리 등이 난다.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울고 있는 경현.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간다.
텅 비어 버린 방.
곧 이어 하람이 들어온다. 풀이 죽은 얼굴. 방 안을 한 바퀴 돌며 천천히 살펴본다. 그러다 상자 속에 있는 인형에게 시선이 가고, 손을 뻗는다.
인형을 꽉 끌어안는 하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하람 …잘 부탁해.

짧게 입맞춤을 하고 인형을 상자 안에 다시 내려놓는 하람. 창문 앞에 선다.

하람 없네. …보고 싶은데.

오랜 시간 창밖을 내다본다.
거실에서 울리는 쿵쿵 소리.
그 소리에 아쉽게 발걸음을 옮기는 하람.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방을 뛰쳐나간다.
하람이 나가기가 무섭게 방으로 들어오는 경현과 성태. 경현의 손에 전화기가 들려있다.

경현 당장 전화해야 돼.
성태 (전화기 붙잡으며) 시간이 몇 신데? 그 집 사람들 생각은 안 하니?
경현 지금 하면 틀림없이 하람이가 받을 거야. 단무지 보겠다고 아직 안자고 있을 거라구.
성태 민폐야. 내일 아침에 해도 되잖아.
경현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밖에 나가 있느라고 정신이 없는 아이야. 집에 있을 땐 안 그랬는데 거기선 마음이 잘 안 붙나봐. 전화하면 자꾸 나가 있대.
성태 내가 내일 전화해서 얘기해줄게.
경현 (빼앗아 전화 거는) 당신 말 못 믿어. 내가 직접 할 거야. 니가 보고 있는 건 달이라고 내가 직접 얘기해 줄 거야.
성태 (전화기 도로 빼앗아들며) 달이든 뭐든 이제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
경현 어떻게 상관없어? 엄만데.
성태 너도 사실 귀찮았던 거 아니야?
경현 아니야. 난 노력했어. 달이라고 알려주려고 계속해서…
성태 말로만 했지? 저건 달이다.
경현 …….
성태 마음으로 해보지 그랬어?
경현 …온 마음을 다했어. 남은 정성까지 모두 쏟아 부었어.
성태 근데 왜 바로 잡아주지 못했어?
경현 당신이 하는 말만 믿었어.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구.
성태 그래서 포기해버렸지?
경현 …….
성태 너는 나한테만 강요했던 거야. 정작 자신은 그렇게 못하면서.
경현 아니야. 난 진심으로 사랑했어, 내 딸을.
성태 맞아. 당신은 진심으로 그 아일 아꼈어. 우리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경현 다르지 않았어. 두 아이 모두 하나 같이 아꼈다구.
성태 사람은 동시에 둘 이상을 사랑하지 못해.
경현 부모는 가능해. 세상 어느 부모도 자식을 차별하진 않아.
성태 머리론 그렇지.
경현 아니. 마음으로도 그래.
성태 그래. 어느 손가락이든 물면 아픈 법이니까. 하지만 그건 내 자식이라야만 가능한 거야.
경현 하람이도 내 자식이야.
성태 손가락은 손바닥 아닌 데에서 날 수 없어.
경현 났다고 믿으면 그만이잖아.
성태 그런 믿음은 아이에게 상처만 줄 뿐이야.
경현 안 들키면 돼.
성태 이미 들켰어.
경현 …이제부터라도 잘 하면 되잖아. 얼른 가서 데리고 오자. 더 늦기 전에.
성태 안 돼.
경현 왜?
성태 곧 있으면 우리 아이가 태어나. 그 이상 뭐가 필요해?
경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성태 우리 아이한테만 집중해도 모자라. 그만 잊어.
경현 싫어. 전화기 내 놔. 당장.
성태 경현아.
경현 그거 아니면 못할 까봐?

거실로 나가려는 경현.

성태 없어!
경현 (날카롭게 쳐다보는)
성태 큰집에 없다고.
경현 그럼? 그럼 어디 있는데?
성태 …….
경현 어디 있어!
성태 (등 돌리며) 다시 보냈어.
경현 뭐?
성태 죄송하다고, 잘 부탁하고 왔어.
경현 …당신한테 맡기는 게 아니었어. 내가 데리고 있었어야 했는데. 당신을 믿는 게 아니었어!
성태 괜찮았어. 괜찮댔고.
경현 얼른 가봐야 해. 많이 무서울 거야.
성태 불편해하지 않았어.
경현 앞장 서, 얼른!
성태 우리랑은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해.
경현 버림받고 온 아이야. 그런 아이를 어떻게 또 버릴 수가 있어?
성태 버린 게 아니야. 돌려보낸 거지.
경현 당신은 정도 없니?
성태 애는 정으로 키우는 게 아니야. 그런 애는 특히 더 그래. 근데 당신 어땠어?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가 불현듯, 버려진 아이야, 그러니까 잘 해줘야 돼, 하는 생각 들면 나만 닦달했어. 눈에 빤히 보이는 걸 애라고 못 봤겠니?
경현 …그런 적 없어.
성태 더 좋은 인연을 만나러 간 거라고 생각 해.
경현 포장하지 마. 당신은 그냥 구미에 안 맞으니까 버린 것뿐이야. 이 아이가 태어나도 그럴 거야. 내가 낳았지 당신이 낳았냐면서 전부 나한테 떠맡겨 버릴 테지. 남 일이라는 듯이.
성태 당신이야 말로 포장하지 마. 그 애가 왜 날 더 좋아했게? 그 애는 가식적인 관심보단 꾸밈없는 무관심이 좋았던 거야.
경현 …비약이 너무 심해, 당신은.
성태 나보고만 나쁘다고 하지 마. 당신한테도 책임이 커.
경현 잘 할 거야.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잘 하면 돼. 그럼 우린 좋은 가족이 될 수 있어.
성태 너무 늦었어.
경현 늦지 않았어!

경현, 상자로 가서 성태가 꾸려놨던 짐들을 모두 풀어낸다.

경현 동생이 태어나면 욕심 부리지 않고 다 양보하겠다고 했어. 인형도 줄 거고, 예쁜 옷도 줄 거랬어. 참 착한 딸이지? 우리 기적이가 딸이면 옷 같은 건 안 사 입혀도 돼. 언니가 다 물려주겠다고 했으니까. 싫어도 별 수 없어. 다른 집들도 다 그런 거니까.
성태 (도로 주워 담으며)
경현 (끊임없이 꺼내며) 맞아. 그 장난감은 쓸모없어. 하람이도 안 가지고 놀아. 이제 좀 컸다고 유치한가봐.
성태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
경현 …….
성태 끝났어, 경현아.
경현 …어째서?
성태 돌이킬 수 없어졌으니까.
경현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해?
성태 그 애는 우리가 가족이라고 말해줬기 때문에 가족인 줄 알고 살아온 거야.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경현 알려주면 되잖아.
성태 이미 가족이 아니라고 말해버렸어.
경현 다시 말해주면 돼.
성태 누굴 위해서?
경현 그 아이를 위해서.
성태 너를 위해서는 아니고?
경현 …….
성태 도로 데려오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잠시 동안은 그럴 거야, 아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틀에 박힌 말로 아이를 위로하려고 들겠지. 하지만 기적이가 태어나면 또 다시 반복 될 거야. 아이가 놀아달라고 하면 또 귀찮아 할 거고, 칭얼대면 동생도 안 그러는데 넌 왜 그러냐며 나가 놀라고 하겠지. 그래놓곤 기적이 데리고 나가서 그네 태워주고, 미끄럼틀 태워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지. 아이한테 미안해할 필요는 없을 거야. 당신한테는 동생이기 때문이라는 적절한 변명 거리가 있으니까.
경현 안 그럴 거야.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예뻐해 줄 거야.
성태 그럴 수 없어. 당신이 성인군자는 아니니까.
경현 만약… 만약에 그럼 당신이 옆에서 좀 돌봐주면 되잖아.
성태 난 또 단무지 얘기나 하고 있겠지.
경현 …….
성태 조금만 있으면 완벽한 가족이 생겨. 그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우리의 가족. 당신 눈이랑 내 코를 쏙 빼다 박은 아이가 우리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거야. 어딜 가나 김성태 씨 아이 참 예쁘네요, 주경현 씨 아이 정말 귀엽네요, 할거라구. 설레지 않아? 우리의 아이.

경현, 말없이 창밖을 내다본다. 여전히 흐리기만 한 날씨.

경현 …비가 올 거야.
성태 눈이 온다고 했어.
경현 너무 추워.
성태 (창문 닫으며) 그렇게 춥지 않은데. 집에만 있어서 그럴 거야.
경현 이불 가져다 줘.
성태 방으로 가자.
경현 여기서 자고 싶어.
성태 한기가 들어 와서 안 돼.
경현 가져다 줘.

성태, 한숨 쉬며 안방으로 향한다.
자리에 눕는 경현, 몸은 창문과 마주하고 있다.
방으로 들어오는 하람.

하람 엄마. 방에 가서 자. 동생 추워.
경현 (귀찮은듯) 괜찮아.
하람 이불 가져다줄까?
경현 괜찮으니까 나가서 만화나 봐.

하람, 경현의 다리를 주물러준다.

하람 동생은 언제 나와?
경현 나중에.
하람 내일 나왔으면 좋겠다. 그럼 소꿉놀이도 같이 하고 재밌을 텐데. 그치?
경현 하람아. 엄마 피곤해.
하람 안 시원해?
경현 (짜증스럽게) 그만 하고 제발 나가서 놀아.
하람 …알았어.

시무룩한 얼굴로 방에서 나가는 하람.
경현, 모두 잊어버리고 싶은 듯 눈을 질끈 감아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지 자세를 고쳐 앉는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어 본다. 하지만 답답함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 모양.
성태가 이불을 들고 방으로 들어선다.

성태 (이불 내려놓고) 왜 그래? 답답해?
경현 (대답 없이 호흡을 고르는)
성태 (몸 이곳저곳을 주물러주며) 창문 좀 열까?

경현, 성태의 손길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성태 어디가려고?
경현 뭘 좀 먹어야겠어.

주방으로 나가는 경현.

성태 (쫓아 나가며) 냄새 싫다고 해서 버렸는데. (소리) 얼른 다시 해줄게. 잠깐만 기다려.

텅 빈 방. 적막하다.
안으로 들어오는 하람. 장난감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지만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낯선 곳에 온 듯 어색하고 두려워 보인다.
창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구름만 가득 끼어 있어 아무 것도 찾아볼 수가 없다.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주방에서 컵 깨지는 소리.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경현의 비명소리 들린다.

성태 (소리) 여보, 왜 그래! 경현아!
경현 (소리) 아이. 아이가 나올 것 같아!
성태 (소리) 잠깐만. 조금만 참아. 조금만!

비명소리와 쿵쿵대는 발소리 뒤섞인다.
그리고 잠시 뒤 현관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
집 안, 조용해진다.
홀로 남은 하람,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하지만 아이는 미동조차 없다.
철컥, 하고 수화기 드는 소리.

성태 (소리) 예. 낳았어요. 딸이에요. 예. 애미도 건강해요. 근데…….

전화 끊어지고 통화 단절음만 남는다.
하람, 듣기 싫은 듯 귀를 막아버린다.
단절음 사라지고 또각또각 발자국 소리. 그리고 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
아기가 울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도 달래주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는 하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하람 단무지…….

다시금 무릎에 얼굴을 묻는 하람.
아기 울음소리 서서히 잦아들며,
막.

남희선  문예창작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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