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學(대학)은 偉大(위대)한 精神(정신)의 故鄕(고향)

  일곱 해 동안이나 머물렀던 대학에서 고향을 등지는 기분으로 졸업을 맞게 됩니다. 스무살서부터 서른살 사이는 대학에 籍(적)을 두었다는 사실 밖에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大學(대학)은 커다란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만권의 책을 다 합쳐도 못 미칠 정신이 사는 곳입니다. 石造館(석조관) 후미진 강의실 길목에 서서 멋쩍게 기웃대던 나의 1학년이 사는 곳입니다. <G301>강의실은 小兒病(소아병)을 앓는 늙은 환자의 병실처럼, 나의 초조와 불안을 잠재우던 곳입니다. 이곳은 또한 디딤돌 같은 對話(대화)와 현실적인 希望(희망)을 키워가는 온실이며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 學究(학구)의 옹달샘 같은 곳입니다. 여기엔 비닐 책가방과 구겨진 바지 자락, 둘러앉아 먹던 도시락 냄새, 단정치 못한 머리카락들이 흩어져 있는 나의 分身(분신)입니다.
  나의 大學(대학)은 화사한 봄날의 꿈이기보다는 오히려 書庫(서고) 가득 찬 책들, 손때 묻은 책상에 서려있는 꿈이며 溫故知新(온고지신)의 대화입니다. 잔잔한 주름살 속에 번지는 老敎授(노교수)의 말씀 같은 것입니다.
  대학은 靑銅(청동)의 미소 속에 담긴 久遠(구원)한 자비와 연민의 정신이 사는 곳입니다. 4월 燃燈(연등)날, 두 손 합해 우러르던 信實(신실)한 마음들이 사는 곳입니다. 향기 짙은 꽃그늘에 숨어 얼굴 붉히며 사랑하던 젊은이의 思念(사념)입니다. 나무숲 사이로 난 사색로에 앉아 북한산 머리에 드리운 주홍댕기를 어루만지는 젊은 詩人(시인)의 번민입니다. 온갖 추함이 있다 해도 감히 다가서지 못하는 아름다운 孤獨(고독)들이 사는 아침의 山寺(산사)같은 곳입니다.
  졸보기 속에 번뜩이는 視線(시선)으로 온 세계를 가늠하고 싶었던 끊임없는 知識(지식)에의 동경입니다. 거기엔 ‘럿셀’과 ‘아룽’의 사상이 있고 ‘모옴’과 ‘프랭클린’의 談論(담론)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마치 하나인 것처럼 共存(공존)하는 현대의 참모습 같은 것입니다. 滿人(만인)의 ‘패토스’에 호소하던 ‘마르틴․루터․킹’의 검은 눈물입니다. 민주의 論理(논리)로 ‘데모’의 장례행렬을 이루던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썩음은 이미 成熟(성숙)이 될 수 없다고 외쳤으며 설익은 열매가 어찌 씨앗을 싹 트일 수 있겠느냐고 自制(자제)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분명한 것은 현실이 바로 價値(가치)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희망은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大學(대학)은 진실한 交友(교우)의 만남입니다. 判斷(판단)에는 담백하고, 때로는 강렬하게 귀를 때리는 우정들의 만남입니다. 詩論(시론)도 있고, 풍자와 해학에 깃든 共鳴(공명)과의 부딪침입니다. 춥고 목마른 때에 따끈한 茶(차)를 권하는 선배와의 만남이며, 나를 알고 있는 나에겐 무척 부담스럽기조차 했던 후배들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찌그러진 어깨를 추슬러주던 친구들과 만나는 握手(악수)입니다.
  이 交友(교우)는 사람다움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서 가난한 마음을 채워줍니다. 따끈한 물에서 우러나는 홍차 빛깔 같은 은근한 마음들의 엇갈림입니다.
  그리고 대학은 젊음입니다. “마릴린 몬로”의 숨결이 맥주거품처럼 일렁인다 할 정열입니다.
  ‘캠프․화이어’ 주변에서 먼지처럼 쌓인 피곤과 어둠을 털고, 떨치는 合唱(합창)입니다. 이것은 힘차게 흘러내리는 大河(대하)의 생명입니다.
  精神(정신)은 주인을 가지고 있으며 그 사람의 靈魂(영혼)을 타고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人格體(인격체)인 이 대학에 주인이 보이지 않음을 탓합니다. 주인이 되려는 ‘이니셔티브’는 있어도 정말 주인 될 사람은 적은 것 같습니다.
  게으른 주인은 주인 자격이 없습니다. 대학의 주인이 되고자 하면 勤勞(근로)를 중요하게 여기는 생활철학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부지런히 갈고 닦지 않은 사람은 힘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업신 받는 사람이 됩니다. 좌절과 열등감은 이러한 사람들에 찍히는 낙인입니다. 그리고 좌절과 열등감은 죄악이 됩니다.
  대학은 理想人(이상인)의 살림살이입니다. 모든 사회는 法(법)과 愛情(애정)을 혼동하는 데서 기강이 해이한다고 말합니다. 규율을 무시한 애정은 이미 애정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대학엔 理想的(이상적)인 살림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 가족 모두의 반성을 바탕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학사모를 받아들고서 대학의 敎授(교수)․硏究(연구)가 더욱 건강하고 學問(학문)에 大成(대성)하기를 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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