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罪(죄)와 罰(벌)’을 읽고

  ‘罪(죄)와 罰(벌)’은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大文豪(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뛰어난 長篇小說(장편소설)로 그의 마지막 大作(대작) ‘까라마조프家(가)의 형제들’과 나란히 가장 代表的(대표적)인 作品(작품)이고 그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읽히고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베쩨르부르그의 가난한 대학생인 ‘라스꼴리니꼬프’는 현실적으로는 無力(무력)하고 빈곤하지만 理知的(이지적)이고 思索的(사색적)인 청년이었다.
  그는 인간을 凡人(범인)과 非凡人(비범인)의 두 종류로 나누어 생각하여 전자는 일반적인 도덕률과 법률에 따라 살아야 하지만 후자는 그것을 짓밟고 초월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확신한다. 즉 非凡人(비범인)의 範疇(범주)에 속하는 인간은 인류전체의 행복을 目的(목적)으로 할 때에는 다른 범인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며 또 마땅히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理論(이론)을 過信(과신)하는 ‘라스꼴리니코프’는 자신에게 과연 일반적인 道德律(도덕률)을 밟고 넘어설 능력이 있는지 어떤지 苦悶(고민)한다. 그는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는 정열이 명하는 대로 또 그 이론을 實證(실증)하기 위해 스스로 고리대금업을 하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 결과는 자기가 나폴레옹的(적)인 선택된 强者(강자)는커녕 하나의 凡人(범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실신상태에서 악몽에 시달린다. 決死的(결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다하여 자기 자신의 불안과 공포에 對抗(대항)하여 싸운다. 사실 자기가 정말 非凡人(비범인)이었다면 살인 이후에 아무런 심적 동요도 일으키지 않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 행위가 가져온 양심의 가책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그는 罪意識(죄의식)에 떠는 참혹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에는 철학적인 이론의 동기뿐만 아니라 그의 처절할 정도의 빈곤, 성격, 병, 형제애. 미신, 그리고 우연까지도 마련되고 많은 副人物(부인물)을 동원하여 만약 그에게 그 이론이 없다 해도 역시 살인을 범했으리라 하는 분위기의 迫眞性(박진성)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하더라도…
  ‘라스꼴리니꼬프’는 쫓기고 있는 자신을 느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빨리 체포돼 주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제3자의 눈에는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그는 자기의 죄를 自由(자유)하고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덜고 싶었던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완전 범죄자가 될 수 없는 인간이었지만 의지로써는 자기의 의견을 끝까지 지켜보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래서 적어도 자기의 범죄를 후회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의 내면에서는 자신을 잃고 고민을 하는 것이다.
  이때 신을 믿는 <성스러운 賣春婦(매춘부)> ‘쏘냐’를 알게 된다. ‘네 손가락은 맑게 비치는 것 같다’고 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인상이 ‘쏘냐’의 인간의 상 전체에 관하여 말하여 준다.
  그는 불안과 공포와 고독감에 떨면서 고민하다가 그녀에게서 원시 기독교적인 소박한 사랑의 가르침인 <나사로의 부활>을 발견하고 마침내는 자기의 죄를 고백한다.
  하지만 완전히 후회한 것은 아니었다. <나사로의 부활>에 관한 성경구절을 들었지만 그것이 그의 의식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 뒤 그는 ‘쏘냐’의 권고를 생각해내고 센나아광장 한가운데에 엎드려 대지에 입을 맞추지만 그때도 역시 후회까지는 하지 않았다. 스비드리가이로프의 자살소식을 듣고 충동적으로 자수할 결심을 했을 때에도 아직 후회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의식적으로 마음의 부담을 덜었던 것에 불과하다.
  드디어 ‘쏘냐’의 感化(감화)에 자수를 결심한 ‘라스꼴리니꼬프’는 8년의 형을 선고받아 시베리아로 보내져 그곳에서 재생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시베리아의 옥중에서 비로소 진심으로 복음서를 손에 집어들고 자신의죄를 후회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제로 옥중생활을 겪은 도스토예프스키의 信念(신념), 새로운 삶의 반영을 본다는 것은 결코 의외의 일은 아닌 것이다.
  작자는 성스러운 창녀 ‘쏘냐’를 통해서 <고뇌를 통해서의 淨化(정화)>라는 그의 근본 사상을 표현하고 <오만한 인간들이여-순종하라>고 외친다. 이래서 에필로오그에서는 시베리아에서의 작자자신의 사상적 轉向(전향)을 연상시키는 듯이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에 사는 ‘쏘냐’의 ‘라스꼴리니꼬프’에 대한 승리가 그려진다.
  한편 무시무시한 背德漢(배덕한)인 스비드리가이로프가 ‘라스꼬리니꼬프’의 누이동생인 듀냐에게 시도했던 것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살인을 시도한 것이나 다름없다. 둘 다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단지 틀리는 것은 ‘라스꼴리니꼬프’가 ‘꼬냐’라는 믿음의 출구를 통하여 新生(신생)을 결심하는데 반해 스비드리가이로프는 끝내 자살해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또한 ‘라스꼬리니꼬프’가 理論(이론)을 사랑하고 그 理論(이론)을 실천에 옮긴 점에 비해 그는 정욕을 사랑하고 자기 의지를 끝까지 관철시키려했다. 실제로 그는 ‘라스꼴리니꼬프’의행동면을 확대한 일종의 分身(분신)인 것이다.
  앙드레 지이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分析(분석)하여 <理智(이지)의 세계와 情熱(정열)의 세계, 그리고 이지와 정열만으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未知(미지)의 세계로 구성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 해당되는 말로써 ‘罪(죄)와 罰(벌)’에서의 理智(이지)의 세계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논리적인 觀念(관념)의 세계이고, 정열의 세계는 스비드리가이로프의 악마적인 行動(행동)의 세계이고 논리와 정열만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未知(미지)의 세계이며 ‘쏘냐’의 그리스도교적인 신성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이지의 세계와 정열의 세계는 모두 滅亡(멸망)하고 ‘쏘냐’에 의해 하나의 길로 이끌어진다.
  결국 ‘罪(죄)와罰(벌)’이 ‘라스꼴리니꼬프’의 <이 세상에 아무런 존재 가치도 없는 저 탐욕스런 고리대금업을 하는 노파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강렬한 자아에서,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 害毒(해독)을 끼치는 존재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인간도 신의 눈으로 보면 의젓한 存在(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라는 진리를 깨달을 때까지의 心理(심리)의 曲折(곡절)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바로 <새로운 한걸음>으로 균형과 질서를 깨뜨린 ‘라스꼴리니꼬프’의 回心(회심)은 민중에의 回歸(회귀)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는 도스토예프스키, 바로 작자 자신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현대인이면 누구나 이런 종류의 고독감, 인류라고까지는 않더라도 개개의 인간과의 連帶感(연대감)의 상실, 즉 자기상실의 상황을 마음 한구석에서 실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꼬리니꼬프’의 살인이 작품 세계에서 이미 그의 세대에서 그 싹을 보여준 즉 현대적 상황을 처참한 것으로 생생하게 예언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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