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한 입담으로 소외된 이들 껴안은 시인

편집자주
 
신경림 시인의 첫 시집 <농무>는 창작과 비평이 발행했던 창비시선의 첫 시집이었다. 그 만큼 그의 시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었고, 그의 언어는 시대를 대표하는 언어였다. 민요풍의 율격과 구수한 입담속에 담긴 소외된 이들을 향한 그의 따뜻한 시어를 느낄 수 있는 신경림의 문학세계를 만나본다.

 

대학생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친구들과 술집을 배회하며 글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낭만이 무엇이니, 문학이 무엇이니 하며 겉멋이 제대로 든 작가 지망생이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시인은 최소한 담배 파이프 정도는 물어야 하고, 빨간 넥타이가 잘 어울리며 밥은 안 먹어도 소주는 마셔야 하는, 말 그대로 외형이나 삶 자체가 기인처럼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신경림 시인과의 만남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경림 시인 초청특강’을 듣게 되었다. 이전부터 시인의 시를 읽어오던 터라 ‘신경림’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았지만 실물을 본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에는 유명한 시인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자랑거리였기 때문에 나는 선뜻 강의실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시인에 대한 ‘이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강의실 한쪽에서 조용하게 앉아 있던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골목의 선술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동자 또는 검게 그을린 농부의 그것과 흡사(恰似)했다. 한마디로 너무나 소박하고 수수한 차림이었다.

몇 년이 흘러 내가 조교로 일할 때 시인의 특강을 손수 준비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선생님, 학교 올라오시느라고 힘들지 않으셨냐요?”라고 여쭙자 “천천히 올라오면서 구경하니 재미있더라.”고 말씀하시며 웃던 모습은 학부 시절 내가 보았던 신경림 시인의 연장선으로 기억된다.

혼란의 시대를 노래하다
 
신경림 시인은 1955년 ‘문학예술’에 ‘갈대’, ‘묘비’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이후 고향을 오가기도 하고 공장을 전전하는 10여 년간 시를 쓰지 않다가 1965년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며 1973년에는 첫 시집 ‘농무’를 발간한다.

그의 10여 년간의 행적에 대해서 나는 소상히 알지 못하지만 그 시기가 공부만 하거나 글만 쓸 수 있었던 때가 아니었다는 말을 그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공백에도 불구하고 신경림 시인이 내놓은 ‘농무’는 ‘창작과 비평’에서 출간한 ‘창비시선’의 첫 번째 시집으로 그 의미와 가치는 여러 논자들을 통해 평가 받았으며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시집이기도 하다.

신경림 시인을 수식하거나 지칭하는 말은 유독 다양하다. 물론 한 시인과 그의 작품 세계를 몇 개의 단어나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들이 유통되는 것은 그 시인의 특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그를 가리키는 말은 ‘농민’ 또는 ‘노동자’를 포함한 ‘소외된 이들’을 껴안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1960?70년대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많은 변화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생긴 부작용들 또한 빈번하게 나타나던 시기였다.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농무’ 중)처럼 가난한 농부들이 신명나게 춤을 추며 그들의 애환을 잊으려 했고,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 두 점을 치는 소리 /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가난한 사랑 노래’ 중)처럼 도시의 빈민들은 주변의 소리조차 막연한 두려움으로 와 닿던 시절이 1960?70년대였다.

신경림 시인은 그들에게 오감을 열어 한국 사회의 병폐와 시대의 착란에 주목하고 이를 자신의 작품에 녹여 낸 시인의 하나로 한국시단에서 평가된다. 이런 점은 1954년에 본교 영문과에 입학하였지만 생업의 문제와 혼란했던 사회 분위기로 인해 10년이 넘도록 졸업을 하지 못했던 그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특히 그가 창작한 시들 중에는 특별한 사연으로 탄생된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랑 노래’는 노동자로 생활하며 가난하게 살던 연인이 어느 날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게 되어 신경림 시인에게 축시를 부탁하자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지은 작품으로 알고 있다. 푼돈이 생기면 친구들을 불러모아 술집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의 피신처였던 문학을 알기 위해 시집을 통째로 외우며 흥얼거렸던 신경림 시인에게 시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 놓인 사다리와도 같았던 것이다.

‘지금 여기’ 신경림 시인

그러나 이런 점만으로 그를 재단하거나 평가하기는 부족하다. 여러 대표작들이 회자되며 지금까지도 신경림 시인의 위치가 유효한 것은 창작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다.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시집을 쏟아낸 시인에 주목하여 학계에서도 그의 작품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창작법과 미학적인 측면, 특히 민요풍의 율격과 구수한 입담에서 전해지는 신경림 고유의 정서를 중심으로 그를 조명하는 비평과 논문이 발표되는 한편 국어국문학과와 문예창작과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평가가 확장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점은 100주년을 맞아 혜화문 입구에 건립된 그의 시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본교에는 만해, 조지훈, 서정주 시비 등 여러 시비들이 존재하지만, 생존 작가로서 시비가 건립된 일은 신경림 시비가 처음이다.

문학관을 건설하거나 시비를 세울 때 작고(作故) 작가가 중심이 되는 풍토를 감안한다면 이런 사례는 이례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동국대학교의 문학을 조명할 때 신경림 시인은 빠질 수 없는 인물이며, 이는 한국시사에 끼친 그의 영향력과 ‘지금 여기’ 독자의 사랑을 받는 시인으로서의 신경림을 방증하는 예라고 볼 수 있다.

2004년에는 ‘신경림 시전집’이 출간되어 그의 작품을 집대성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낙타’라는 시집을 발간하는 등 그는 여전히 창작에 몰두하며 이후에 출간될 그의 전집의 페이지를 늘리고 있는 중이다. 흥미로운 점은 신경림 시인은 동시대 여타 시인들과는 달리 시론의 성격을 띤 글을 발표한 일이 드물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시인으로 남고 싶고 시인으로서의 직분에만 충실하고 싶은 그의 신념으로 여겨진다.

여전히 동국대학교에 머무르는 시인

신경림 시인은 현재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직책의 특성상 학교에 상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어국문학과에서는 매 학기마다 초청특강을 개최하여 많은 이들에게 그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초청특강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 때면 언제나 친절한 목소리로 응답해주시던 시인의 음성이 생각난다. 시를 읽는 이들이 드물어진 시대에서도 여전히 시의 역할과 책임을 믿으며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시인. 그의 특강을 듣거나 혜화문을 지날 때 ‘목계장터’가 새겨진 시비를 보는 것은 서술된 기호로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왜 그가 시를 쓰고 시대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그의 특강에 참석하면 재학 시절 일화나 당시 학교 풍경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을 수 있다. 이런 점은 그가 시를 창작하게 된 동기와 이후에도 계속 시를 쓸 수 있게 만들어준 원동력이 많은 부분 모교에서 기인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왕왕 학교에 찾아와 후배를 위해 자신의 추억과 신념에 대해 말하는, 시인으로서의 신경림과 동문으로서의 신경림 그 ‘사이’는 그렇게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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