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지식인의 인간의식 구조의 밑바닥에는 짙은 불안이 감정과 어두운 회의의 빛과 절박한 위기의식이 자욱하게 깔려있다.
  人間(인간)의 自由(자유)와 個性(개성)과 능력에 대한 명확한 신념 속에서 자기긍정의 의식과 넘치는 人間禮讚(인간예찬)의 감정으로 충만했던 르네상스적인 밝은 自我意識(자아의식)은, 균형을 잃은 文明(문명)과, 一面(일면) 포만 一面(일면) 기갈의 친절하고 극단적인 오늘날의 허다한 비극과 위기 앞에 맥을 쓸 수 없을 만큼 위축되고 말았다.
  현실과 理想(이상) 사이의 갭을 뛰어넘을 수 없을 때 人間(인간)은 좌절의 심연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상과 가치가 무너질 때 人間(인간)은 또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허무주의란 그것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생의 목적과 의미의 상실을 말하는 것으로서 좌절의 궁지에 몰린 현대지성이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무서운 함정이기도 한 것이다.
  人間(인간)은 주체적 존재인 동시에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내적 存在(존재)다. 이 主體性(주체성)과 상황성이 그 균형을 잃을 때 人間(인간)에게 비극이 싹트기 시작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더욱이 상황성이 主體(주체)를 위압할 때 人間(인간)과 人格(인격)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되고 社會(사회)와 역사는 혼돈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는 것을 지난날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값비싼 교훈이기도 한 것이다. 허다한 요인으로 해서 脫人間化(탈인간화), 非人格化(비인격화) 해가는 무기력하고 처절한 자신의 모습을 다시 정립하고 자기의 운명과 역사를 自主的(자주적)으로 改造革新(개조혁신)하고자 하는 엄숙한 자각의 소리는, 그것이 바로 부조리한 현대를 살고 있는 지성인의 양심의 부르짖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안일과 무사주의의 터전에는 침체와 타성이 기식하기 마련이다.
  인간다운 질서에서 그 존엄과 품위와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문명과 역사에서 소외된 것, 이것이 오늘날의 <위기>라고 한다면 그 위기는 전화위복으로 우리가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도약의 <발판>일 수도 있다. 어떤 처지에서도 우리는 위기 앞에 우리의 운명을 내맡겨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위기는 항상 인간에게 절박한 결단과 선택을 요구한다. 眞理(진리)와 허위, 정의와 不義(불의), 善(선)과 惡(악)을 식별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위기란 행동적이고 실천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을 어떤 실천적 행동으로 몰아넣는 비상한 상황이다.
  우리는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상황을 옳게 식별하고 용감하게 결단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옳게 결단하기 위해서는 옳은 판단이 필요하다. 바로 행하려면 바로 알아야 된다. 옳은 실천은 옳은 이론에서 생긴다. 현대문명이 여러 영역에서 人間性(인간성)과 知性(지성)을 억압하고 소외화하는 여러 가지 惡(악)에 대해서 휴머니즘은 否定(부정)과 抵抗(저항)의 행동을 그쳐서는 아니 된다. 프로우테스트정신과 레지스탕스의 행동은 휴머니즘의 본질이다.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휴머니즘은 생동적이고 투쟁적인 요소를 갖는다. 휴머니즘에서 이러한 요소를 거세해 버린다면, 人類(인류)의 역사를 진보와 정의의 방향으로 전진시키는 사상적 에네르기를 거세해버리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다.
  전쟁, 빈곤, 질병, 무지, 편견, 압재, 불의, 폭력 등 수많은 온갖 惡(악)이 있다. 그 악을 고발하고 그 악에 저항하고 그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투쟁하고 인간을 非人間化(비인간화)하려는 모든 요인을 극복해서 인간 본래의 빛과 기치와 존엄성을 되찾는 것은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양심 있는 지성인의 초미의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제기되는 <問題(문제)>들과 대결한다는 것이고 그 부단한 대결을 통해서 사람다운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이고 또 보다 나은 人間(인간) 조건을 후손 만대에 물려주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역사상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에도 인간을 비인간화하고 인간의 양심에 재갈을 물리는 비정한 세력과 부조리한 사상과 요인들이 발휘하지 않았던 때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人類(인류)의 예지는 그들과 맞서서 자신의 설 땅을 확보해 왔던 것이다. <人間(인간)의 운명은 人間(인간)의 손에 있다>고 말한 사르뜨르는 다시 人間(인간)은 누구나 <내가 내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 나 자신을 만들어 나아간다. 내가 내 인생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내 결단과 책임하에 내가 내 운명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人間(인간)의 主體性(주체성)과 行動性(행동성)의 강조는 우리 생활의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꼭 같이 요구되는 生命(생명)의 본질이기도 한 것이다. 태평연월하고, 국태민안한 도화경에서도 그러하고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위협하는 극단적인 위기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포만과 안일에 탐닉했을 때 생동하는 이념과 가치창조의 정신이 살아 약동될 수 없는 것은, 안 밖의 정신적 물리적 위험 앞에 묵묵히 묵종하는 노예근성 속에서 창조적인 삶의 설계를 기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극한적인 상황에서 위축하기 마련이고 좋든 싫든 간에 현실에의 적응과 영합에 민감한 우리 人間性(인간성)의 否定的(부정적)인 속성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일깨워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기부정을 자초하면서 生活(생활)의 목표와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처참한, 역사의 미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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