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重的(이중적) 구조의 矛盾性(모순성) 내포

  1. 思考性(사고성)

  人間(인간)은 하나의 갈대, 자연에서 가장 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 人間(인간)을 분쇄하기 위해서 宇宙(우주)全體(전체)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한 줄기의 蒸氣(증기), 한 방울의 물도 그를 죽이기에 充分(충분)하다. 그러나 인간을 분쇄하는 경우 외에도 人間(인간)은 그를 죽이는 자보다 한층 더 고귀한 것이다. 왜냐하면 人間(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宇宙(우주)가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宇宙(우주)는 이것을 모른다. 호모 사피엔스-사람은 분명히 理性的(이성적)으로 思考(사고)하는 動物(동물)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근본 요소는 이 理性的(이성적) 思考能力(사고능력)에 있다. ‘하이덱거’(獨(독)1889~)는 인간은 주사위처럼 이 세상에 내어던져진 被投性(피투성)의 존재인 까닭에 참된 자기의 실존을 알려면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며 이성적인 올바른 사고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편 파스칼은 이성의 한계성을 말했다. 이성은 만능이 아니라는 말이다. Socrates(希(희)BC470~399)가 말한 바와 같이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문제라고 했듯이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고 파스칼은 말하고 있다. 먹고 놀고 향락하는 것만 사고한다면 사고에 무슨 品位(품위)와 존엄성이 인간에게 있겠는가? 그것은 이성의 타락이요 思考(사고)의 비극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많이 보아 왔다. 더구나 그 사람 나름의 편파적 고집 때문에 올바른 理性(이성)이 마비되어 온갖 惡(악)이 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이 결과 개인이 타락되고 가정이 몰락하고 결국에는 한 나라의 역사가 왜곡되어간다.


  2. 中間性(중간성)(中間者(중간자)의 運命(운명))

  인간은 천사도 아니요. 짐승도 아니다. 천사가 되려는 者(자)가 짐승이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너무나 많은 술과 너무도 적은 술, 그에게 술을 전혀 주지 말라. 그러면 그는 眞理(진리)를 발견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아주 많이 주어라. 결과는 마찬가지다.
  人間(인간)은 天使(천사)가 되기 전에 짐승에 가깝고, 짐승이 되기 전에 천사에 가깝다. 人間(인간)은 천사의 원리와 짐승의 원리를 아울러 지닌다. 人間(인간)에게 그 천사적 요소만 말하고 동물적 요소를 제시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동물적 측면만 말하고 천사적 측면을 주장하지 않는 것도 위험하다고 파스칼은 주장하고 있다. 또 파스칼은 너무 큰 소리도 너무 작은 소리도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너무 짧은 이야기도 긴 이야기도 인간은 이해하기 힘들다. 너무 강한 쾌락은 인간을 불만케 하니 인간의 정신이나 능력이 中間性(중간성)에 처해야 한다는 것을 말했다.
  東洋(동양)에서 말하는 中庸(중용)이라든지 人間(인간)의 魂(혼)의 偉大性(위대성)은 중용을 벗어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中庸(중용)에는 벗어나지 않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중용을 잃은 者(자)의 비참함을 알고 있다. 나치스를 이끈 히틀러의 政策(정책)은 확실히 중용을 잃은 미치광이였다. 이 미치광이가 世界(세계)에 放火(방화)했다. 이것이 世界(세계) 2차대전이다. 돈·주앙은 쾌락의 중용을 잃었다. 그래서 지금껏 향락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나만이 꼭 偉大(위대)한 것도 아니고 나만이 꼭 劣等(열등)한 것도 아니다. 傲漫(오만)해서는 안 되고 自卑(자비)해서도 더욱 안 된다. 過不足(과부족) 없는 狀態(상태), 이것이 人間(인간)의 참된 모습이라고 한다.


  3. 二重星(이중성) (二重星(이중성)의 狀況(상황))

  理性(이성)과 情念(정념) 사이에 일어나는 人間(인간)의 투쟁 만일 인간의 情念(정념)을 갖지 않고 理性(이성)만 갖는다면… 만일 인간이 理性(이성)을 갖지 않고 情念(정념)만 갖는다면… 그러나 양자를 아울러 갖기 때문에 人間(인간)은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쪽과 싸우지 않고서는 다른 쪽과 和平(화평)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인간은 언제나 分裂(분열)되고 자기 자신에 반항한다. 우리는 반항한다. 아니 인간은 반항한다. 자기 자신에게 반항하는 과정에 인간은 成長(성장)해나간다. ‘로고스’와 ‘파토스’의 中間子(중간자) 입장에서 인간은 理想(이상)과 現實(현실)의 갈등, 善(선)과 惡(악)의 투쟁, 靈(영)과 肉(육)의 대립, 빛과 어둠의 항쟁이 중간자의 운명이다.
  파스칼은 또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 나무는 自己(자기)의 비참한 것을 모른다.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 人間(인간)은 위대성과 비참함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人間(인간)은 절망해서도 안 되고 희망만 가지고도 안 된다. 요컨대 인간은 우주를 빛나게 하는 영광인 동시에 우주를 더럽히는 쓰레기 人間(인간)은 怪物(괴물)과 패러독스의 존재다”라고 파스칼은 말한다.
  Rousseau(佛(불) 1712~1778)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有用(유용)한 人間(인간)’과 ‘쾌적한 인간’으로 나눌 수 있다.
  有用(유용)한 인간이란 주로 자기를 위해서만이 일하는 인간인데 이 社會(사회)에서는 모두 快適(쾌적)한 인간이 되려고만 함으로써 거기에서부터 갖가지 惡德(악덕)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機械文明(기계문명)속에서 어떻게 자기를 이끌고 나아가느냐의 문제에 부딪치고 있을 때 이 인간의 2중성은 큰 비중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파스칼에 의하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理性的(이성적) 思考(사고)의 主體(주체)로서의 인간, 兩(양)·極(극)의 中間者(중간자)로서의 人間(인간), 그리고 2중적 구조를 갖는 모순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존재성을 파스칼은 팡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人間(인간)이란 얼마나 不可思議(불가사의)한 것인가- 이 얼마나 奇妙(기묘)한가- 얼마나 怪物(괴물)인가- 얼마나 渾沌(혼돈)한가- 얼마나 驚歎(경탄)할만한 것인가? 모든 것의 審判者(심판자), 지구의 어리석은 벌레, 眞理(진리)의 보관자, 不確實(불확실)한 誤謬(오류)의 소굴, 宇宙(우주)의 榮光(영광)이면서 우주의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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