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와 동대신문

우리 고향중의 고향이여’란 시에서 미당 서정주는 “님께서 이룩하신 진리의 묵은 밭을 맡아선 끝없이 꽃피며 갈지로다”라고 썼다. 진리의 묵은 밭은 바로 우리대학을 상징한다. 1906년 명진학교를 필두로 중앙불전, 혜화전문, 그리고 지금의 동국대학교가 존재하기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동악의 찬란한 104주년. 동악 속에는 국가의 동량지재(棟梁之材)의 산실이자 불교문화의 구심점(求心點)으로 나아가기 위한 역동적인 몸짓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에 동대신문 지령 1500호를 기념해 이번 특집에서는 사진과 글을 통해 우리대학 건물의 기원과 그 역사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건축 년대별로 A,B,C,D 영문 이니셜 부여

“저기 문화관K건물이 어디에요?”

문화관K? 건물 뒤에 붙은 K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대학 건물이름에는 영문약칭이 같이 붙어있다. 이는 건물이 생겨난 순서대로 알파벳을 부여(附與)한 것으로 가장 먼저 생겨난 명진관(A)에는 영문약칭 A가 붙는다. 그럼 지금부터 건물이 생겨난 순서대로 우리대학의 역사를 밟아보자.

1953년 2월 6일. 우리대학이 종합대학교로 승격 받음과 동시에 학내외는 새로운 변혁기를 맞았다. 휴전협정에 따라 군에서 제대한 재학생의 복학과 종합대학으로서의 변화로 인해 늘어난 정원을 수용할 공간이 협소했기 때문이다.

이에 학교당국가 재단 측에서는 1954년 고려대학의 건물을 설계한 국내 굴지(屈指)의 건축가 송민구씨를 초빙해 같은해 9월 기초공사 착수에 들어갔다. 명진관에 소요된 거액의 자본은 당시 후원회와 미군 공병대의 3만 5천달러 원조가 큰 도움이 되어 1956년에 명진관(A)가 준공이 되었다.

다음으로 대학본관(C)은 1954년 기초공사에 착수해 1958년 본관이 준공됐다. 대학 본관 공사가 진행되던 1957년 명진관 뒤뜰에 지금의 과학관(D) 건립된다. 당시 지하실이 95.2평, 1층이 362.15평, 2층 402.7평, 밴더하우스 18.75평으로 그 규모는 다른 어느 대학에서도 볼 수 없는 규모였다.

1958년에 준공을 마친 과학관에 이어 1964년에는 지금의 혜화관인 중앙공무원 교육원 건물을 매입했다. 원래 이 건물은 1962년에 공무원의 교육을 목적으로 지어졌었지만 다른 곳으로 이전이 결정되어 재단은 봉은사 토지 10만평을 매각해 그 돈으로  중앙 공무원 교육원을 매입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혜화관(G)이다.

또 학생회관의 신축도 함께 진행된다. 이어 70년대 초에는 지금의 박물관인 전자계산소가 설립되었다. 또한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구성된 학림관(J)도 드디어 준공을 마쳤다. 그리고 1987년, 우리대학은 중문 앞 재향군인회관 건물 및 부지를 매입하게 되는데 이것은 지금의 문화관(K)이다. 그리고 그 옆의 학술문화관(S)은 1996년 2년간의 착공으로 완공되었다. 

 

 

남산타워가 뿜어내는 오색빛깔 화려한 조명 불빛 아래, 고즈넉한 남산 한 자락에 위치한 동국대학교. 우리대학은 서울의 사대문 내에 있는 유일한 대학으로서 104년 동안 굳건하고 웅장한 역사를 자랑한다.

오늘도 우람하고 깊은 문화를 창출해내고 있는 동악 속에는 팔정도를 사이에 두고 수많은 동국인 들의 발걸음이 오고 간다. 바삐 움직이는 이들의 발자국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동국 문학의 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명진관,  임금이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정령을 반포하던 경희궁의 중심이었던 옛 숭정전 건물을 그대로 옮겨온 정각원 등. 우리가 발걸음을 옮기는 곳곳마다 동악의 역사와 숨결이 오롯이 담겨있다.

유명한 역사학자인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역사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아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의미를 생각했을 때 비로소 그 참뜻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동악의 104년, 그 역사는 지금 우리대학이 어떻게 여기에 자리하게 됐는지, 또,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지 알려주는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동악 건축물의 시대별 발자취를 하나하나 따라가 보자.

▲우리대학의 기원, 명진학교

우리대학 역사의 첫 페이지는 명진학교로부터 시작된다. 동대문 밖에 건립 된 원흥사(元興寺)에서 명진학교 개교를 맞은 이래, 불교학교로서의 면모를 탄탄히 다지기 시작했다. 이후 명진학교는 불교사범학교로 개칭되었고 다시 불교고등학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3.1운동 시절 우리대학은 3.1운동의 요체였다. 불교계 인사와 사찰을 식민지 정책에 동화시키려는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자 당시 우리대학의 전신이었던 중앙학림은 동맹휴학을 전개하는 등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때문에 불온한 항일투사의 양성소라 하여 강제 폐쇄를 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22년 명륜동에 2층 교사를 지어 불교전수학교로 다시 개교한 후 1922년 중앙불전으로 개칭한다. 전국 사찰의 후원을 힘입어 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해 1927년에 건물 신축을 마친다. 

▲혜화전문학교

혜화전문 시대는 그야말로 일제의 탄압의 연속이었다. 길고 긴 일제강점기의 터널을 벗어나 조국 광복과 더불어 혜화전문학교는 큰 변환기를 맞는다. 사실 이때까지는 전문학교였지 종합대학이 아니었다. 우리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되기에는 학교 시설과 규모가 빈약했다.

그러나 조계학원은 대학승격을 결의했고 수차례에 걸쳐 부지를 논의하게 된다. 결국 1946년 9월 20일 혜화전문학교에서 동국대학으로 승격됨에 따라 기존 시설과 규모의 협소함을 타개하기 위해 현재 중구 필동 3가 26번지 일대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이로써 우리대학은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와 더불어 우리나라 사학 중 가장 오랜 전통과 연륜을 쌓게 된다.

▲동국대학교 시대

1950년대 후반 점차 종립대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그런가하면 우리대학이 자리잡은 필동의 교지는 원래 일본 사찰의 각 종파들이 남산 기슭의 경승지(景勝地)를 골라 사찰을 건립한 곳이다. 해방 이후 우리대학이 매입해 교사로 사용한 까닭에 이후 학교 건축물을 세우는데 불편함이 많았다.

또한 1976년 12월에는 정각원(正覺院)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정각원은 경희궁 숭정전이 그 시초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연회, 접대 등 공식행사가 행해지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시 숭정전 건물은 조계사에 의해 매각되어 이전되어 후에 우리대학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대학은 발전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다. 경주캠퍼스에 이어 LA캠퍼스와 일산캠퍼스까지, 오늘도 서정주가 말한 ‘님께서 이룩하신 진리의 묵은 밭’인 동악캠퍼스의 세력 확장은 여전히 지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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