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제 나름대로 길을 낸 교차로, 執念(집념) 덩어리 책가방을 힘으로 들고 가는 사람, 도서관은 고요로 그 무게를 지탱하고 여름의 뜨거운 숨결을 知性(지성)으로 同化(동화)시킨다. 農村奉仕(농촌봉사)를 떠나는 사람의 땀에 젖은 배낭엔 村(촌)사람의 소박한 웃음을 따겠다는 意慾(의욕)이.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여행가방엔 여름의 소리와 색깔을 담아오겠다는 싱그러움이. 배움의 길을 자기 힘으로 지탱해야 하는 사람은 방학이란 큰 빗자루로 길을 닦는다. 모두 익는다. 결실을 向(향)한 행군.…○


  햇빛이 종일 뜨겁다. 학교에 다닐 때라면 이렇게 더운지도 몰랐을 텐데 이렇게 집에 앉아 땅 밖을 내어다 보면 햇빛은 뜨겁다 못해 불처럼 타오르는 듯이 보인다.
  하루 내 바다와 하얀 모래, 푸른 숲, 맑은 바람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지냈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 맞는 여름방학을 나는 고교시절의 아련한 추억 속에서 미리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래언덕은 반짝인다. 무수히 이곳저곳 눈이 부신다. 아이들이 햇빛 속에서 뛰어내린다. 갈색의 팔, 다리가 모래 속에서 엉긴다. 모래 위에서 뒹군다. 얼마 후 아이들은 소나무 그늘 밑에서 옷 속의 모래를 끄집어내고 땀조차 나지 않는다. 일어서면 모래가 부스스 떨어져 내린다. 아이들은 신발 안에 가득 담긴 모래를 쏟아버리고 신발을 끌며 돌아온다.
  언제나 바다는 아름답다. 하지만 모래언덕은 훨씬 더 아름답다. 강렬한 반사 신경 속에 나는 없어져 버리고 공기의 자그만 입자처럼 대기를 헤엄치게 되는 것이다. 마치 꿈꾸는 나비처럼 나는 날개 대신 슬리퍼를 끌고, 꽃 사이를 누비는 것처럼 모래언덕을 누빈다. 그리고 때로는 해당화 꽃을 볼 때도 있었다. 그때 같이 지내던 친구 중에 아주 재미있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와 내가 함께 하는 일이란 것은, 해변 끝까지 걸어가서 인적 없는 해변의 모래 위에 십자가 하나만 놓여있는 하얀 예배당을 발견한다거나, 해변으로부터 육지를 향해 걸어가다가 이윽고 초가지붕의 농가를 발견하는 정도였다. 그 친구가 서울에 있을 때는 남산을 잘 오르내렸다. 그것도 찌는 듯한 여름날에 특히 그러했다. 온몸에 땀을 흘리며 오르는 것이다. 편한 것만 찾는 나는 물론 한 번도 시도해 본 일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한해 지나고 나서야 나도 그렇게 하고픈 충동을 느끼는걸 보면 1살 더 먹은 보람이 있는 모양이다. 땀을 흘리며 山(산)에 오르고 싶다. 그리고 내 감정을 깨끗이 씻고 싶다.
  나는 기차를 탈 것이다. 터널이 많고 지형이 험악한 중앙선을 타고 내려가다가 산이 여럿, 절이 여럿 있는 고장에 내릴 것이다. 밤에는 모기에게 굉장히 뜯기고, 낮에는 온몸의 수분을 증발시켜 버리게 될 것이다. 내 머리는 텅 비어서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의 표정, 걸음걸이, 마음씨를 살피고 스님의 얼굴을 스케치하고 싶다. 그들의 눈이 끝없이 맑을 것을 기대하며. 지난 겨울 합격자 발표가 나고 남해로 여행을 갔었다. 도중에 우리는 송광사와 선운사에 갔었는데, 그 때 스님이 내게 해주신 말씀이 지금도 생각난다. 나무에 달린 바나나 열매를 따려하지 말고 공중에 있는 학을 잡으라는 말씀이었다. 내 친구에겐 거북이 털을 그리라고 했었다.
  이번 여름엔 기필코 바나나 열매 따는 아이가 되지 않으리라고 마음먹고 있다. 여행을 떠날 때 우선 나는 아름다운 ‘말라르메’ 시집과, ‘헤세’ 시집을 넣을 것이다. 하얗고 적당히 작고 질이 좋은 스케치북과, 잘 써지는 만년필, 2B와 4B연필, 색깔이 많은 크레파스도 함께 가지고 갈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혼자 있고 싶다. 잠시 웃고 떠들고 술 마시고 노래하는 생활을 벗어나 마음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여행이 끝났을 때 나는 다시 낯익은 바다, 내가 좋아하는 바다가 보이는 모래언덕에 앉아 저녁노을을 보며 다시금 생각해 보고 싶다. 나를 돌아다보고, 나 자신을 바르게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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