感傷(감상)과 悔恨(회한)·豊饒(풍요)의 言語(언어)

  詩(시)의 모티브(素材(소재))를 우리들의 日常生活(일상생활)에서 보고 듣는 일, 즉 단순한 外界(외계)의 形象(형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思考(사고)는 어느 모로 보면 타당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보고 듣는 일’은 사실을 알기 위한 것이지, 文學(문학)의 궁극적 目的(목적)인 表現(표현)하기 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단순히 ‘되어진 일’만을 모티브로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하등의 美意識(미의식)도 藝術(예술)도 追求(추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意味(의미)에서 詩(시)의 모티브는 外界(외계)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事件(사건)이 아니고 詩人(시인)의 內面(내면)에 나타난 感動(감동)과 直感(직감), 그것이 바로 詩(시)의 모티브인 것이다.
  결국 詩(시)의 모티브는 단순한 ‘있는 것’이 아니고 詩人(시인)의 內心(내심)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詩(시)는 어디까지나 高貴(고귀)한 生命(생명)의 感動(감동)을 모티브로써 포착해야 하며 또한 이것을 살아있는 言語(언어)로써 展開(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나는 몇몇 가을의 詩篇(시편)들- 抒情詩(서정시)의 주요한 공급원이 된 ‘가을’을 소재로 한 詩篇(시편)들을 더듬어보자.
  四季(사계) 中(중) 가을. 그것은 感傷(감상)의 言語(언어)로 나타나기도 하며 때로는 悔恨(회한)으로, 때로는 豊饒(풍요)와 圓熟(원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뒤늦게 창작시기가 오래된 가을의 詩篇(시편)들을 들추는 것은 가을이란 詩(시)의 모티브가 여러 시인들의 關心(관심)에 어떻게 포착되어 있으며 또 어떠한 言語(언어)로서 전개되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모더니즘의 詩論(시론)을 실제로 실천한 金光均(김광균)의 ‘北靑(북청) 가까운 風景(풍경)’이란 시가 섬칫 떠오른다.

汽車(기차)는 당나귀같이 슬픈 고동을 울리고
落葉(낙엽)에 덮인 停車場(정차장) 지붕위엔
가마귀 한 마리가 서글픈 얼굴을 하고
코발트빛 하늘을 쪼고있었다.
파리한 모습과 낡은 바스켙을 가진 女人(여인) 한 분이
차창에 기대어 聖經(성경)을 읽고
기적이 깨어진 風琴(풍금)같이 처량한 복음을 내고
낯설은 風景(풍경)을 달릴적마다
나는 서글픈 하품을 씹어가면서
고요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여행 중에 본 하나의 風景(풍경)을 스케치한 그림과 같이 아름답고 印象的(인상적)인 作品(작품)이다. ‘北靑(북청) 가까운 風景(풍경)’은 詩(시)題目(제목)부터가 畵題(화제)같은 느낌을 주지만 內容(내용) 역시 風景畵(풍경화)를 보는듯한 느낌이다.
  詩(시)란 言語(언어)의 藝術(예술)이라 그림과 같이 線(선)이나 色彩(색채)가 있을 수 없지만 하나의 風景(풍경), 하나의 이미지를 言語(언어)로 표현한 이 詩(시)를 한 폭의 그림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이 詩(시)에서의 ‘가을’이란 모티브는 ‘슬픔’으로 나타났다. 汽車(기차)는 당나귀 울음같이 슬픈 汽笛(기적)을 내면서 달아났고 정거장 지붕위에서 무엇인가를 쪼아 먹는 까마귀의 표정도 슬펐고 또 汽車(기차)가 깨어져버린 風琴(풍금)같이 복음을 내며 달릴 때마다 詩人(시인) 자신도 하품을 하면서 서글픈 마음으로 두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咸南(함남)의 小都市(소도시) 北靑(북청)의 가을 情景(정경)이 퍽 공허한 인상을 주는 詩(시)이다.
  다음에는 가을을 소재로 하여 고독을 읊은 시를 읽어보면 어떨까? 가을을 맞는 시인의 고독을 읊은 시로는 尹崑崗(윤곤강)의 ‘立秋(입추)’가 생각난다.

소리 있어 귀 기울이면
바람에 가을이 묻어 오는

바람 거센 밤이면
지는 잎 창에 와울고

다시 가만히 귀 모으면
가까이 들리는 머언 발자취.

낮은 게처럼 숨어 살고
밤은 단잠 설치는 버릇.

나의 밤에도 가을은 깃들어
비인 마음에 찬 서리 내린다

  詩人(시인)은 가을을 맞아 무슨 소리인가 들리는 것 같아 귀를 기울여 본다. 바람 소리에 가을이 묻어온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밤이면 落葉(낙엽)이 창 앞에 다가와 버석거리는 소리가 어쩌면 서러워 우는 울음같이 들린다.
  가을이 되면 詩人(시인)은 낮에는 방안에서 숨어 살고 밤엔 밤대로 단잠 설친다. 이러한 生活(생활)이 습성이 되었는데 밤마다 詩人(시인)의 허전한 마음에 차디찬 서리 같은 孤獨(고독)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詩(시)에는 쓸쓸한 가을밤의 차거울 정도의 고독이 서려있다.
  특히 맨 마지막 詩句(시구)는 무어라 表現(표현)하기에 어려운 가을의 孤獨感(고독감)을 보여준다.
  素月(소월)의 詩(시) ‘길’도 공중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바라보며, 자기의 갈 바를 정하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는 詩人(시인)의 孤獨(고독)한 心情(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갈래갈래 갈린 길/ 길 있어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오’라고 孤獨(고독)을 느끼는 詩人(시인)의 心情(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무수한 가을의 詩篇(시편)들은 실로 여러 가지 言語(언어)로 나타나있다.
  가을이란 한 節侯(절후)가 詩人(시인)의 內面(내면)과 言語(언어)를 빌어 孤獨(고독)과 悔恨(회한)으로 그리고 슬픔, 쓸쓸함, 또 結實(결실)의 喜悅(희열)로 나타나기도 한다.
  四季(사계) 中(중) 가을이 가장 빈번히 詩(시)의 모티브가 된 것 같다. 外國(외국)詩(시)에서 보다 韓國(한국)詩(시)에서 더 그런 느낌이다.
  西洋(서양)에선 14세기까지 ‘서머’(여름)와 ‘윈터’(겨울) 二季(이계) 뿐이었다고 한다. 西洋(서양)에서 가을이란 節侯(절후)는 英國(영국)詩人(시인) 초오서에 의해 빛을 본 계절이라고 한다.
  英國(영국) 固有(고유)의 가을이란 말은 ‘하비스트’와 ‘폴’이 있었는데 이것은 落葉(낙엽)이나 收穫(수확)을 나타냈다고 한다. 節侯(절후)를 뜻하는 ‘오텀’보다도 ‘하비스트’와 ‘폴’이 詩語(시어)로선 훨씬 더 적격이다.
  가을철의 收穫(수확)의 悅樂(열락)에서 오는 풍요의 詩(시)를 읽어보도록 하자.

  Ⅰ. 밤
명랑한 이 가을 고요한 夕陽(석양)에
저 밤나무 숲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니?

숲 속엔 落葉(낙엽)이 구으는 餘韻(여운)이 맑고
투욱 툭 여문 밤알이 무심히 떨어지노니

언덕에 밤알이 고이져 안기우듯이
저 숲에 우리의 조그만 이야기도 간직하고

때가 먼 航海(항해)를 하여 오는 날 속삭이기 위한
아름다운 過去(과거)를 남기지 않으려니?

  Ⅱ. 감
하아얀 감꽃 뀌미뀌미 뀌미던 것은
五月(오월)이란 시절이 남기고 간 빛나는 이야기어니

물밀 듯 다가오는 따뜻한 이 가을에
붉은 감빛 유달리 짙어만가네.

오늘은 저 감을 또옥똑따며 푸른 하늘밑에서 살고 싶어라
감은 푸른 하늘밑에 사는 열매이어니

  Ⅲ. 石榴(석류)
後園(후원)에 따뜻한 햇볕 굽어보면
장꽝에 맨드라미 고웁게 빛나고
마슬 간 집양지 끝에 고양이 졸음 졸 때
울밑에 石榴(석류)알이 소리없이 벌어졌네.
透明(투명)한 石榴(석류)알은 가을을 장식하는 홍보석이어니
누구와 저것을 쪼개어 먹으며 十月(십월)상달의 이야기를 남기리

  세 가지 과실을 두고 읊은 辛夕汀(신석정)의 ‘秋果(추과)三題(삼제)’란 詩(시)이다.
  ‘밤’은 對話(대화)의 形式(형식)이고 ‘감’과 ‘石榴(석류)’는 獨白(독백)의 形式(형식)을 취한 아름다운 抒情詩(서정시)이다.
  ‘감’의 첫 聯(연)의 ‘뀌미뀌미’란 表現(표현)은 하얀 감꽃은 뀌미는 모습을 나타낸다. ‘감’이란 詩(시)가 아름다운 점은 가을철마다 붉어지는 감을 묘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감을 하나하나 따면서 하늘밑에 살고 싶다고 한 詩人(시인)의 人生觀(인생관)에 있을 것이다.
  人間(인간)과 自然(자연)을 융합시키려는 詩人(시인)의 哲學(철학)이 엿보인다. ‘石榴(석류)’에서는 처음으로 발견한 석류에 대한 놀람 외에도 석류알을 두고 생각하는 詩人(시인)의 孤獨(고독)도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장꽝’이나 ‘마슬간 집’, ‘시월상달’ 등의 詩句(시구)가 素朴(소박)해서 좋다. 가을은 역시 풍요와 圓熟(원숙)의 계절이다. 그러한 것을 노래한 詩(시)로는 柳致環(유치환)의 ‘꽃’ 楊明文(양명문)의 ‘果樹園(과수원)’ 등이 즐겨 읽힌다.

  ‘庭園(정원)이 슬픔을 안고 있다. 차거운 꽃 속에 비가 가라앉는다. / 여름이 살짝 몸서리 친다. / 그 終幕(종막)을 향하여’

  ‘9月(월)’이란 제목의 헤세 詩(시)의 一節(일절)이다. 며칠 전 내리던 비가 地熱(지열)을 식히는가 싶었더니 여름이 살짝 몸서리치면서 달아났다고 하기에는 아직은 덥다. 대낮 鋪道(포도)위에 눈부시도록 亂舞(난무)하는 여름의 태양이 고별을 장식할 때 자연은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려 한다. 그리하여 아직은 푸르른 草葉(초엽)들이 뛰노는 大地(대지)는 남모르게 익어간다. 지금 한 낮엔 후덥지근하지만 내일이면 아니 한 시간 후에 을씨년스레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올지 누가 아는가.
  가을은 무엇인가 다가오는 계절이다. 먹을 것, 마실 것, 맞이해야 할 것.

  ‘아이야, 너는 이 말을 몰고 저 牧草(목초)밭에 나가 풀을 먹여라/ 그리고 돌아와 방을 정히 치워 놓고 燭臺(촉대)를 깨끗이 닦아두기를 잊어서는 아니된다.’

  가을은 손님이 오는 계절이다.
  ‘…아직은 오랫동안 더 장미곁에/ 여름이 멎어 休息(휴식)을 그리는’ 9월이다. 아직은 9월인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아직은 9월이라고 할 것인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9월’, ‘어느새 가을’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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