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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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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문학 100년 <4> 석정 신석정불행한 시대에 피워올린 올 곧은 시(詩) 정신

흔히 신석정 시인을 말할 때 전원시인, 목가적 서정시인이라고 하지만, 그의 그러한 태도는 단순한 안빈낙도(安貧樂道)는 아니었다. 종교적으로는 스승이었던 석전 박한영의 깊은 불교적 신심이 바탕이었고, 문학적으로는 변하지 않을 지조(志操)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상념에 잠긴 신석정 시인.

 

시 공부와 동국대학교의 인연

신석정 시인이 동국대학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30년 3월 서울로 상경하여 당시 석전 박한영 선사가 경영하던 동국대학교의 전신 중앙불교전문강원에 들어가면서부터이다. 애초에 ‘문학과 인생’에 대한 고민을 시로 풀어보기 위한 상경이었고 그 목적을 위한 첫 걸음이 중앙불교강원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1924년 이미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한 그는 한문공부와 노장철학, 도연명의 시, 타고르의 시를 공부하면서 동양적인 정신세계에 깊이 심취해 있었고 중앙불교강원에서 시작한 불전 공부는 이런 그의 시세계를 확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불경을 배우는 것은 강원에 있게 되니 의무로 지워진 나의 일과였고 문학서적을 탐독하는 것이 그 때 나의 본업이었다”는 회고에서도 보듯이 시에 관한 열정은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의 불전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에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불전에 대한 공부가 그에게 그저 의무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고, 불교를 통해 자신의 시세계를 찾고자 했기에 불교에 대한 그의 학구열도 상당히 높았다.

이미 만해 한용운의 시에 깊은 관심을 지닌 그였기에 동국대학교와의 인연은 그의 문학적 행로에 이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불교강원에서 ‘불교유경’, ‘사십이장경’, ‘대승기신론’ 등을 청강하면서 불교에 심취했고 원생들과 함께 프린트판으로 문학회람지인 ‘원선(圓線)’을 발간했는데, 여기에는 30여명의 승려와 원생들이 참여했다.

이때 선암사 출신의 승려로서 강원에서 함께 공부하던 조종현을 만났는데 조종현은 당시 동요를 주로 쓰다가 후에 노산 이은상에게 시조를 배워 유명한 시조시인이 되었다.

조종현과 함께 신석정 시인은 주요한을 찾아 동광사로, 만해 한용운을 찾아 중앙불교 종무원 불교사로, 춘원을 찾아 동아일보사로 다니곤 했는데, 주요한과 만해 한용운은 이후 신석정의 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앙불전에서의 생활은 이후 ‘시문학’ 3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정지용, 김기림, 박용철, 이하윤, 김광균 등을 만나 교유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중앙불전 강원의 은사 석전 박한영

중앙불전에서 신석정은 한때 출가하여 불가에 귀의할 뜻까지 품었으나 고향의 아이와 아내를 뿌리칠 수 없어 결국 포기하고 만다. 불문에 귀의할 것을 포기한 데는 가족뿐만 아니라 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는데, 문인들과의 교유과정에서 그의 갈 길이 불문(佛門)이 아니라 문학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전 박한영에 대한 은사로서의 경외심은 그에게 아주 크게 자리 잡고 있었고, “신군 이제 신심이 나는가”라는 석전 스님의 말씀을 종교적으로는 따르지 못했지만, 시와 학문에도 그런 신심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학문에 신념이 없으면 언제 어느 때 고귀한 지조를 팔아넘기는 속한이 안 된다고 보증할 수 있을까”라는 신석정의 다짐은 모두 석전 박한영에게 받은 교훈이었다.

중앙불전의 은사인 석전 박한영의 정신적 가르침은 이후 서정주, 함형수 등이 모두 중앙불전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문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즉,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공부한 대부분의 문인들이 불교에 기초한 동양적인 정신세계를 시로 썼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근대문학과 동국대학교와의 인연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를 통한 정신적 깨우침이 한국문학을 이끌었고 그 접점에 바로 동국대학교가 있었던 것이다. 만해 한용운, 신석정, 서정주 등 한국의 뛰어난 시인들이 불교와의 인연을 통해 한국의 문학이 나아갈 길을 고민했고 새로운 정신세계를 개척해 나간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자연으로의 귀의와 슬픈 구도

불문에 귀의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신석정 시인이 안주한 곳은 청구원(靑丘園)이다. 가난과 싸우며 인생을 조촐하게 살리라 다짐하고 그 집에 청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의 처녀 시집 ‘촛불’에 나오는 전원생활이 대부분 그가 스스로 가꾼 청구원에서 얻은 것이다.

이 무렵 청구원으로 찾아온 문인이 장만영, 서정주 등인데 신석정은 당시 문학청년이었던 이 두 사람을 가장 반가운 손님이라고 하며 그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

고향으로 돌아간 신석정이 그저 ‘안빈낙도’를 추구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의지할 데 없는 정신적 고아로서 괴로워하면서도 스승의 가르침인 ‘신심’을 갈구하며 시를 위해 정진한 것이 그 당시 그의 생활이었다.

“시정신이 없는 민족, 시정신이 없는 국가는 흥할 도리가 없다. 시정신의 바탕이 되는 것이 신념이요 신념은 바로 지조로 통하는 것이다”는 그의 말이 이런 신심에서 발원된 것임은 분명하다. 신석정 시인의 자연 속에 이후 ‘문장’, ‘인문평론’의 폐간으로 이어지는 암울한 현실에 대한 의식이 담겨 있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슬픈 구도(構圖)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워 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 새끼 한 마리 뛰어 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드뇨

“불행한 세대에 태어나서 불행한 속에서 불행한 청춘을 고스라니 장사 지냈다”는 그의 회고처럼, 불행한 세대에 대한 그의 의식은 산, 노루, 새, 검은 하늘 등 자연의 대상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좀처럼 물러가지 않을 시대의 암울 속에서 오직, 산과 푸른 하늘과 검은 밤만이 그를 에워싸고 있다.

완전한 고립 속에서 ‘슬픔’에 젖은 한 시인이 바라는 것은 ‘꽃 한 송이 피워 낼 지구’,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이다. 그런 지구가 사라진 곳, 그곳에 그의 자연이, 전원이 놓여 있다.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는 것은 밤하늘의 별 뿐, 이런 절대 고독과 슬픔 속에서 씌어진 것이 바로 그의 ‘슬픈 목가’들이다. 신심을 잃지 않으려고 밤하늘의 별에 모든 마음을 두려고 하는 시인을 우리는 그저 단순한 전원시인, 서정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동국대학교와 불교를 통해 맺은 ‘신심’이 자연 속에서 한 시대의 암울과 희망을 동시에 보는 지조 높은 시인을 낳은 것이다. 

 

   
▲집필중인 신석정 시인.

 

 

   
▲신석정 시인이 고향인 전북 부안에 내려가 삶을 보낸 청구원.

 

 

   
▲새만금 방조제 앞 신석정 시비.

 

김춘식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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