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에의 염원 속에 영원한 民族像(민족상) 그려

  萬海(만해)선사님의 글을 처음 본 기회는 무척이나 우연한 기회라 하겠다. 佛敎(불교)의 ‘佛(불)’字(자)도 모르던 내가 大禪師(대선사)요, 民族(민족)의 지도자이신 禪師(선사)님의 글은 그 당시 기대와 흥미를 갖게 하기는 충분하였다. 어딘지 모르게 心象(심상)깊이 저려오는 아픔과 끊일 줄 모르는 님에 대한 염원은 흥미와 기대보다는 깊은 또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그 後(후)로 東國(동국)학원에 몸을 담고 강의시간과 行(행)함으로 가르치는 말씀으로 法(법)에 대하여 조금 알 수(?) 있게 된 후에 더욱 만해선사님의 글이 가슴에 남게 되었다.
  萬海(만해)禪師(선사)께서는 1879년 충남 홍성군 성곡리에서 태어나시고 속명을 裕天(유천), 法名(법명)은 용운, 法號(법호) 萬海(만해)로서 1905년 27세 때 得道(득도)하셨으며, 1944년 6월 29일 입적하셨다. 그분은 平生(평생)을 통하여 겨레와 조국을 위하여 투쟁하셨고 佛敎(불교)를 대표하시기도 하셨으며 詩(시)를 남기시어 겨레의 가슴을 적시기도 하셨으니 한 몸에 3사람 몫을 감당했다고 할 것이다. 詩(시)에서 佛法(불법)을, 또 독립운동에서 흘러넘치는 詩心(시심)을 느껴야 하겠다.
  禪師(선사)님의 시로 대표되는 “님의 침묵”은 192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탈고하여 1926년 5월 출판된 4×6판 1백68페이지 시집이다. 이 시집의 가치는 시에서 말하기로 하고 선사께서 남기신 글을 세 분야로 나눠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①佛法(불법)

  1913年(년) 35세 때 불교대전을 저술하시며 대장경 1천여 매를 詩(시)로서 승화시킨 것이 님의 침묵이라면 그분의 시에서 법의 심오한 도를 느끼기는 쉬울 것이다. 법을 설하되 법에 치우치지 아니했으며 도를 행하되 넘치지 않으셨다고 한다.

  ②독립운동

  불도에서 속세의 어지러운 시비에 참여하신 의도는 분연히 나타나 있다. 즉 일제의 치하에서 조국을 잃고 겨레가 노예화되는 마당에 불교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하신 것 같다. 결국 3·1운동 지도자가 되셨고 민족의 앞길을 밝히는 불을 태우셨던 것이다.

  ③선사의 敎(교)와 속세

  이러한 법과 민족의 염원을 간직하신 선사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참됨인 것은 당연하였던 것 같다. 인간의 외적 표현보다는 실제적 행함을 가르치셨으며 곧고 추호의 용서가 없는, 한발의 후퇴가 없는 그분의 성격은 옥중고난과 동지로부터의 따돌림을 받았지만 선사께서는 어려움을 이기고 후회를 모르셨다고 한다. 이러한 선사께서 여인의 규방에서 나오는 한숨소리와 연인들의 정담, 이별하는 설움을 어떻게 느끼셨나 하고 생각할 때 역시 감탄을 금할 길 없다.
  또한 情(정)을 승화시켜 “님”에 향한 애끓는 마음으로 승화시킨 것은 그 당시 몰아치던 퇴폐적 낭만주의의 기운 중에 유일한 깊이 있는 사상을 느낄 수 있는 詩(시)로 평가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詩(시)로 들어가기 前(전) 禪師(선사)의 詩(시)에 나오는 “님”에 대한 의미를 알아보면,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라-라는 말씀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이 기루어서 이 詩(시)를 쓴다-고 하시는 말씀을 생각할 때 님에 대하여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님은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佛法(불법)일 수도, 겨레와 민족일 수도, 또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겨레와 조국이 아닐까한다.
  그렇기에 해방이 된 지금에도 禪師(선사)의 詩(시)가 읽히고 또 이들 시의 현대성이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하겠다. 이제는 시에서 님이 갖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님”이란 절대적이라 하겠다.
  “당신이 아니더면”에서 볼 수 있듯이 -나에게 생명을 주든지 죽음을 주든지 당신 뜻대로만 하셔요, 나는 곧 당신이어요- 生(생)과 死(사)조차 맡긴 님, 그래서 나는 곧 당신이라던 말씀, 이것이 님이 아닐까한다.
  “나는 잊고자”에서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 뿐이기로 님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하는 생각이 더욱 괴롭습니다-님을 잊는 것=잠과 죽음.
  이토록 님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좀 더 큰 것으로 승화시킨 일을 다른 어느 詩(시)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잊히지 않는 생각을 탓하지 않고 잊으려는 자신을 괴롭다하신 것은 法(법)을 說(설)하는 몇 배의 여운을 남기게 된 것 같다.
  이러한 사랑을 ‘자유 정조’에서는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다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다시 바꾸어보면 의도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운명적으로 님을 기다리는 것, 즉 민족적 숙명을 말하는 것이라 하여야겠다.
  “이별”에서는 사랑을 말씀하고 있다. -아아 사람은 약한 것이다. 여린 것이다. 간사한 것이다. 죽음으로 사랑을 바꾸는 님과 님에게야 무슨 이별이 있으랴, 사랑의 이별은 이별의 반면에 반드시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별하는 애인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이다. 생명보다 사랑하는 애인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실한 사랑을 위하여는 괴롭게 사는 것이 죽음보다 더 큰 희생이다. 지금의 사랑에 비하면 너무 고지식하다고 하겠지만 진정한 사랑, 大(대)를 위한 사랑 즉 참사랑이라고 정의를 내려 보아야겠다.
  이러한 님이 멀어져 버릴 때 스며오는 아픔은 ‘님의 침묵’에 잘 나타나있다.
-님은 갔읍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읍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읍니다-
-사람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읍니다-
  이렇듯이 님이 가신 후 슬픔을 안고 있지만 슬픔을 새 희망으로 옮기는 의지와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듯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읍니다-하는 확신은 당시 민족에게 주시는 글이었다 하겠다.
  님을 기다리는 구체적인 心情(심정)을 표현한 詩(시)로 “오셔요”를 꼽을 수 있겠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세요, 당신은 당신이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이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오.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읍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십시오, 나의 가슴은 말굽에 밟힌 낙화가 될지언정 당신의 머리가 나의 가슴에서 떨어질 수는 없읍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은 당신을 잡을 수는 없읍니다-.
  죽음을 방패로 님을 지키는 의지가 드러나 있고 님을 원하는 그분의 글은 민속의 가슴깊이 남을 것이다.
  以上(이상)의 9편으로 88편이나 되는 전체 詩(시)를 다 이해할 수는 물론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 님에 대한 염원과 민족의 지도자요, 사상가로서의 行(행)함을 볼 수 있고 여인의 규방까지 함께 계시는 겨레의 친구라는 점은 알 수 있다.
  이미 반세기동안 우리를 이끄는 마음을 주셨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겨레의 불로 化(화)하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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