卒業美展(졸업미전)을 보고

  지난 10월 12일부터 8일간 佛敎大(불교대) 美術學科(미술학과)에서는 76학년도 졸업예정자와 재학생의 작품발표전이 성대하게 베풀어졌었다. 學科(학과) 創設(창설)의 日淺(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좋은 전시회를 갖게 된 것은 학생과 지도교수가 혼연일체가 되어 평소 꾸준히 닦은 노력의 결과라 하겠다. 미술 單科大學(단과대학)이 아닌 한 학과 안에서 東․西洋畵(동․서양화)와 彫塑(조소), 그리고 佛敎古美術(불교고미술) 등으로 전공을 나눠 다채롭게 펼친 전시회라 하겠다.
  그것도 충분치 못한 시설과 커리큘럼상의 적은 전공시간 등 質量的(질량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은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훌륭한 造形美(조형미)를 보여준 것은 자랑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藝術(예술)은 정체되어 고여 있기보다는 끊임없이 일렁거려 내일에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에 卒業展(졸업전)을 중심으로 하여 몇 가지의 아쉬운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작품전을 돌아보고 처음 느낀 점은 이만하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작품전이 아닐까하는 충만감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한구석의 허전한 빈틈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대학에서의 創作行爲(창작행위)는 어디까지나 傳統(전통)에의 충실한 바탕과 새로운 思潮(사조)로 하여 <精神的(정신적)인 亂鬪(난투)의 場(장)>이 되어야 한다. 젊음 속에서는 줄기찬 探究(탐구)와 실험정신이 가득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기성작가의 手法(수법)이나 특정 流派(유파)에만 무조건 매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現代(현대)속의 美術(미술)은 이젠 손으로 그린다기보다는 몸으로 行(행)하고, 표현한다기보다는 存在(존재)하는 것으로 섬세한 감정과 치열한 觀念(관념)이 복합적으로 대치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繪畫(회화)가 이미 회화로 될 수 없는 限界(한계)(장듀뷰페)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렇다고 正統性(정통성)의 아카데미즘을 버리고 前衛(전위)의 대열에만 서라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캠퍼스에서의 美術活動(미술활동)도 多樣(다양)한 테크닉으로 傳統(전통)과 現代(현대)의 제 양상들을 예리하게 포학하여 美的(미적) 價値(가치)로 昇華(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물론 미적 승화에 이르는 길은 안일하고 타성적인 제작태도보다는 꾸준한 자기연마의 刻苦(각고)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기초적인 바탕과 강렬한 造形意志(조형의지)가 없는 행위는 하나의 모험일 뿐 바람직한 實驗精神(실험정신)엔 위배되는 것이다. 자기세계에의 굳은 信念(신념)을 실험정신과 傳統(전통)에의 재점검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괄목할만한 발전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볼 때 東洋畵(동양화)에서 추구하는 世界(세계)는 일견 단순한 듯하지만 매우 심각하다 하겠다. 東洋畵(동양화)는 흔히 비교하듯 西洋畵(서양화)와 같이 可視的(가시적)인 것을 묘사하기 보단 不可視的(불가시적)인 內面(내면)의 世界(세계)를 형성화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秋史(추사)가 주장하듯 <文字香(문자향)과 書卷氣(서권기)>가 없이는 항상 轉移模寫(전이모사)에서만 맴돌 뿐 氣暗生動(기암생동)이 본령인 東洋畵(동양화)의 深底(심저)에는 접근도 못할 것이다. 하물며 請是無形之畵(청시무형지화) 畵是無聲之請(화시무성지청)의 오묘한 경지는 어떻게 表現(표현)할 것인가. 더군다나 現代畵(현대화)에 있어서는 테크닉도 중요는 하지만 作品(작품) 밑바닥에 깔려있는 思想性(사상성)과 造形性(조형성)이 더욱 중요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얄팍한 손재주만으로 그림을 그리던 시기는 지난 것이라 하겠다.
  위의 文字香(문자향)과 書卷氣(서권기)의 두 造形活動(조형활동)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것이어서 西洋畵(서양화)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機械主義(기계주의)의 極大化(극대화)에 만연되어 昏迷(혼미)에 빠진 오늘날의 西歐(서구) 現代美術(현대미술)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젠 우리도 무조건의 西歐(서구)지향적 思潮(사조)에서 벗어나 전환기의 새로운 美術(미술)로 내달리지 않으면 안 될 때이다. 여기에 캠퍼스에서의 實驗性(실험성)과 치열한 刻苦(각고)가 요망되는 所以然(소이연)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技法(기법)과 材料(재료)의 발굴은 곧 새로운 造形意志(조형의지)에도 부합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점에 있어 이번 作品展(작품전) 중 미약하지만 몇 점의 非具象畵(비구상화) 등에서 참신한 造形言語(조형언어)를 읽을 수가 있었다. 또한 가장 눈부신 변모를 본 장르로는 역시 彫塑(조소)부문이라 하겠다. 大學美展(대학미전)에서도 혁혁한 성과를 세운 바 있지만 우수하고 創意性(창의성)있는 作品(작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材料上(재료상)의 문제에 있어 다소 아쉬운 점이 있었다. 굳이 석고만을 고집한 것은 製作費(제작비)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재료마다의 特性(특성)이 있는 만큼 木彫(목조)․石彫(석조)․鐵彫(철조) 등 다양한 시도가 결여되어 있음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佛像(불상)작품 조성에 있어서(繪畫作品(회화작품)도 마찬가지이지만) 꼭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佛像(불상)은 藝術性(예술성)이전에 어디까지 宗敎(종교)로서의 信仰的(신앙적)인 側面(측면)이 있다. 때문에 원만한 부처님의 相好(상호)를 具足(구족)해야 하는 것이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32相(상) 80種好(종호) 그리고 臺座(대좌)와 光背(광배) 등에서 어긋나 宗敎性(종교성)이 결여된 造成品(조성품)은 파기했다는 점을 기억해주길 부탁한다. 宗敎藝術(종교예술)은 그렇게 단숨에 이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 있어서 佛敎古美術(불교고미술) 분야의 出品作(출품작)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평소 理論(이론)부분에만 애써 공부해왔지만 이 땅에 있어 前例(전례) 없는 古美術綜合展(고미술종합전)을 가졌다는 것은 커다란 意義(의의)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것도 금년으로 創建(창건) 千二百週年(천이백주년)을 맞는 榮州浮石寺(영주부석사)를 택해 중점적으로 調査(조사) 實測(실측)했다는 것은 學界(학계)에도 많은 도움을 주리라고 본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왕의 展示用(전시용)으로 制作(제작)을 한다면 展示效果(전시효과)도 생각했어야 할 것이다. 볼륨 있는 模造品(모조품) 등 좀 더 다양하게 꾸민다면 아주 독특한 전람회가 될 것이다.
  現代(현대)의 美術(미술)이 그렇듯 오늘의 몇몇 작품을 놓고 거론하기란 지극히 위험스런 일이다. 더군다나 각박한 物質文明(물질문명) 속에서 造形活動(조형활동)을 한다는 것 자체부터 많은 抵抗感(저항감)을 받기도 하는 데 말이다. 하지만 이번 東大美展(동대미전)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또 하나의 可能性(가능성)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韓國精神界(한국정신계)의 基底(기저)를 이루고 있는 佛敎的(불교적) 發相法(발상법) 내지 佛敎的(불교적) 屬性(속성)으로 하여 現代美術(현대미술)과 만날 때 무한한 미지의 造形意志(조형의지)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하여 첨예화한 테크닉이 농축된 精神(정신)(佛敎(불교))과 만날 때 來日(내일)의 우리 畵壇(화단)도 그렇게 어둡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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