根本(근본) 思想(사상), 道德法(도덕법)에 기초

  西洋(서양)近世(근세) 偉大(위대)한 哲學者(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東(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市(시)(지금은 소련의 영토)에서 呱呱(고고)의 第(제)1聲(성)을 외치며 地上(지상)世界(세계)의 첫 발길을 내어디뎠다.
  모친 ‘레기나 드로데아’(1698~1737)는 賢淑(현숙)한 18세의 소녀로서 가난한 馬具職(마구직)의 백성인 33세의 ‘요한 게오로그 칸트’와 결혼하여 9년째 되는 해에 네 번째로 世紀(세기)의 哲人(철인) 칸트를 출산하였다. 칸트의 血肉(혈육)들은 대부분 馬具職(마구직) 혹은 織物工(직물공)(단지 동생만은 목사였다)과 같은 수공업에 종사하는 성실한 서민계급이었다. 이러한 가난한 서민가정에서 칸트와 같은 世界的(세계적) 大(대)哲人(철인)이 탄생하리라고는 아무도 想像(상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東(동)프로이센은 근대화에서 동떨어진 後進地(후진지)였다. 아직 前近代的(전근대적)인 專制(전제)思想(사상)과 인간관계가 지배하고 있는 뒤진 곳이었다. 그러나 쾨니히스베르크는 적어도 이 지역에 있어서는 정치‧경제상의 중심지였고 해외무역의 요지였으며 大學(대학)과 敎會(교회)가 있는 文化(문화)와 宗敎(종교)의 도시였다. 한편 英國(영국)을 중심으로 한 産業資本主義(산업자본주의)가 프랑스로 밀려들어와 한창 市民革命(시민혁명)이 성숙하여 가고 있는 것을 멀리 내다보고 마음속에 그리며 근대화 내지 自由(자유)의 根本(근본)思想(사상)이 잉태될 수 있는 望鄕的(망향적) 도시이기도 하였다. 바로 이곳에서 칸트의 위대한 철학은 형성되었고 칸트가 한평생 이 곳을 한 번도 떠난 일이 없을 정도로 쾨니히스베르크는 칸트에게 있어서 絶對的(절대적)인 故鄕(고향)이었다. 보다 좋은 大學(대학)에서 보다 좋은 대우로 초빙을 하여도 칸트는 결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칸트의 저 莊嚴(장엄)한 大(대)哲學(철학)體系(체계)가 형성되기까지는 배후에 위대한 어머니 레기나의 眞實(진실)한 宗敎的(종교적) 信仰(신앙)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東(동)프로이센 지방에는 기독교의 新敎派(신교파)의 일종인 소위 敬虔主義(경건주의) 기독교가 있었다. 이 종교는 루터파에 연유하는 것이나 일절의 形式主義(형식주의)를 버리고 내면적인 敬虔(경건)한 신앙에 중심을 둔 종교파였다. 칸트의 양친은 바로 이 敬虔主義(경건주의)기독교의 성실한 敎人(교인)이었고 특히 칸트는 어머니의 篤實(독실)한 신앙에 깊이 감동되었으며 크게 영향을 받았다. 칸트는 그의 書簡(서간)에서 이렇게 쓴 일이 있다.
  ‘나의 家譜(가보)에 있어서 자랑할 만한 것은(기능직 계급의 출신이긴 하지만) 正直(정직)하고 道德的(도덕적)으로 바르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모범적이었던 양친이 나에게 財産(재산)이라곤(그러나 또한 借用金(차용금)도) 남겨 주지 않았으나 하나의 敎育(교육)을 부여하여 주었다는 점이다. 이 교육은 도덕적 방면에서 볼 때 이 이상의 것은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깊은 恩惠(은혜)의 情(정)을 금할 길이 없다.’ 그리고 또한 칸트의 제자인 ‘야하만’은 이렇게 쓰고 있다.
  ‘선생님(칸트)은 늘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어머니는 愛情(애정)이 풍요하고 感情(감정)이 온화하며 경건하고 진실한 婦人(부인)이었다… 어머니는 때때로 나를 郊外(교외)로 데리고 나아가 神(신)의 作品(작품)(自然(자연))에 나의 주의를 돌리게 하고 敬虔(경건)한 歡喜心(환희심)을 갖고 神(신)의 전능과 지혜와 자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만물의 창조주에 대한 깊은 畏敬(외경)을 나의 마음속에 불어 넣어 주셨다. 나는 절대로 어머니를 잊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의 속에 善(선)의 최초의 萌芽(맹아)를 심어 주셨고 그것을 養育(양육)하여 나의 마음을 열어 自然(자연)의 印象(인상)을 받아드리도록 해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가르침은 나의 생애에 있어서 끊임없이 유익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위대한 인간이 어머니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그의 가슴은 감격에 차 있었고 그의 눈은 빛났으며 그리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아들로서의 마음으로부터 敬慕(경모)의 念(염)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哲人(철인) 칸트가 태어날 수 있었던 眞實(진실)하고 勤勉(근면)하고 敬虔(경건)한 한 市民(시민)의 가정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어머니나 孟子(맹자)의 어머니를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칸트는 8세에 클레기움 푸리드리키아눔(중고교 과정)에 입학하여 16세에 同校(동교)를 졸업하고 同年(동년) 쾨니히스베르크大學(대학)에 입학하였다. 칸트는 이곳에서 크늇첸 교수의 철학과 數學(수학)講義(강의)를 들었고 데게스 교수를 통하여 뉴턴 物理學(물리학)講義(강의)를 들었으며 특히 라이프니츠 볼프 철학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칸트는 1746년 22세에 5년간의 대학생활을 끝마치고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을 졸업하였다. 그 뒤 약 10년간 가정교사 생활을 한 뒤 1755년 31세에 ‘불에 대한 論文(논문)’이 통과되어 마기스타(碩士學位(석사학위)‘를 획득하여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私講師(사강사)가 되었다. 그 후 1770년(46세) 正敎授(정교수)가 될 때까지 私講師(사강사)生活(생활)은 무려 15년간이 걸렸다. 이것으로 볼 때 독일에 있어서의 교수직에 오르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던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칸트가 正敎授(정교수)職(직)에 오른 就職(취직)論文(논문)은 ‘感性界(감성계) 및 睿智界(예지계)의 형식과 원리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뒤의 純粹理性批判(순수이성비판)의 感性論(감성론)과 分析論(분석론)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칸트는 1781년(57세) 純粹理性批判(순수이성비판) 1版(판), 1783(59세) 프로레고메나, 1785년(61) 道德形而上學原論(도덕형이상학원론), 1787년(63세) 純粹理性批判(순수이성비판) 2版(판), 1788년(64세) 實踐理性批判(실천이성비판), 1790년(66세) 判斷力批判(판단력비판), 1795년(71세) 永久平和(영구평화)를 위하여, 1797년(73세) 道德形而上學(도덕형이상학) 1798년(74세) 人間學(인간학) 등 기타 수십 편의 論文(논문)과 著書(저서)를 남기어 近世(근세)哲學(철학)의 元祖(원조)가 되었다.
  筆者(필자)는 먼저 永久平和(영구평화)에 대한 著書(저서)를 소개하기 전에 칸트의 臨終(임종)에 관한 몇 가지 얘기를 부연함으로써 칸트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칸트는 여러 형제자매가 있으나 1804년 2월 12일 독신으로 80평생을 끝마칠 때 末妹(말매)인 바르바라만이 病床(병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칸트가 永眠(영면)하기 몇 일 전의 일이다. 그의 主治醫(주치의)는 동료 교수이자 쾨니히스베르크大學(대학)의 학장이었던 醫學部(의학부) 敎授(교수) ‘에리스나’였다. 에리스나敎授(교수)가 병실로 들어오자 칸트는 病床(병상)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하였다. 多忙(다망)한 그리고 要職(요직)에 있는 에리스나 교수의 열의에 찬 診察(진찰)에 칸트는 마음속으로부터 감사하고 있었다. 에리스나 敎授(교수)가 患者(환자)인 칸트로 하여금 병상에 앉을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에리스나 敎授(교수)가 의자에 앉은 뒤에야 비로소 자리에 돌아갔다. 칸트는 힘이 있는 한의 힘을 다하여 인간에 대한 존경의 情(정)을 표시하고 있었다. 學長(학장)인 醫師(의사)는 눈물이 핑 돌았다. 한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氣品(기품)있는 人格(인격)의 人間(인간) 칸트 모습에 感動(감동)하여 소리 없는 嘆聲(탄성)을 發(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2월 12일이 다가왔다. 칸트는 거의 실신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 칸트는 그의 제자이자 목사인 봐지안스키의 오랫동안의 好意(호의)에 感謝(감사)하려는 듯 창백한 입술로 離別(이별)의 키스를 하려 하였다. 臨終(임종)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물을 탄 포도주를 입에 대주었다. 그것을 마시고 나자 칸트는 가는 소리로 ‘이것으로 좋다.’(Es ist gut)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칸트의 最後(최후)의 말이다. 이렇게 하여 老(노)哲人(철인) 칸트의 獨身生活(독신생활)(그러나 영원한 哲學(철학)과 더불어)의 幕(막)은 내려졌다.
  感性(감성)의 世界(세계)(現實(현실))에서 오는 二律背反(이율배반), 所謂(소위) 칸트가 말하는 ‘形而上學(형이상학)의 戰場(전장)’에서 고뇌하는 ‘人間理性(인간이성)의 特殊(특수)한 運命(운명)’은 철학자인 칸트에 있어서 ‘十字架(십자가)’였다. 그러나 칸트는 理論理性(이론이성)으로부터 實踐理性(실천이성)으로의 전환을 통하여 有限者(유한자)의 ‘運命(운명)과의 和解(화해)’를 이룩할 수 있었다.
  칸트는 人間(인간)의 根底(근저)에는 善(선)의 소질과 함께 惡(악)의 性向(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地上(지상)世界(세계)는 끊임없는 善惡(선악)의 對立(대립)鬪爭(투쟁)이 연속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칸트는 地上(지상)에 있어서의 善惡(선악)의 對立(대립)鬪爭(투쟁)을 排除(배제)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단순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사람들의 團結力(단결력)에 의한 超個人的(초개인적)인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즉 惡(악)을 防止(방지)하고 善(선)의 支配(지배)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道德法(도덕법)을 위한 永續的(영속적) 團體(단체)를 結成(결성)하고 協力(협력)하여야 이것을 지켜나가는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하였다. 칸트는 이러한 倫理的(윤리적) 團體(단체)를 倫理的(윤리적) 公民的(공민적) 사회라고 부르고 善(선)의 원리를 結合原理(결합원리)로 하는 德(덕)의 나라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나라를 완성하는 것은 이성에 의하여 人間(인간)에게 부과된 課題(과제)요 義務(의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義務(의무)는 이미 개인과 개인과의 對人的(대인적) 義務(의무)가 아니라 人類(인류) 自身(자신)에 대한 義務(의무)인 것이다. 말하자면 人類(인류)에게는 客觀的(객관적)으로 공동의 最高善(최고선)을 실현하여야 할 共同目的(공동목적)이 부과되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最高善(최고선)을 실천할 倫理的(윤리적) 團體(단체), 즉 지상에 있어서의 神(신)의 나라의 건설은 法律的(법률적) 公民的(공민적) 社會(사회)인 政治團體(정치단체)가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政治團體(정치단체)의 法的(법적) 體制(체제)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그는 그의 ‘永久平和論(영구평화론)에 제시하고 있다. 그는 人間(인간) 相互(상호)의 모든 敵意(적의)와 惡(악)의 종말을 意味(의미)하는 인류의 永遠(영원)한 平和(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國內法(국내법)의 法體制(법체제)는 共和的(공화적)이어야 하며 國際法(국제법)은 모든 國家(국가)의 자유로운 維持(유지)와 保證(보증)을 목표로 하여 일체의 戰爭(전쟁)을 영원히 終結(종결)시킬 체제를 갖는 國際聯盟(국제연맹)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최후로 世界公民法(세계공민법)은 사람들과 모든 國家(국가)가 外的(외적)으로 서로서로 영향을 주는 關係(관계)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人類(인류)國家(국가)의 公民(공민)으로 보일 수 있는 體制(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칸트의 이러한 주장은 실제로 現(현) 유엔의 전신인 國際聯盟(국제연맹)을 탄생시켰고, 그의 이러한 思想(사상)은 앞으로도 계속 인류에게 큰 影響(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칸트의 根本(근본)思想(사상)은 어디까지나 道德法(도덕법)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사실상 오늘날과 같은 道德(도덕)의 放棄(방기) 내지 沒落(몰락)에 있어서는 國家間(국가간)의 信義(신의)와 協力(협력)은 기대하기 어려우며 自國(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한 나라의 존립의 問題(문제)는 안중에도 없는 형편 하에서는 진실로 世界平和(세계평화)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다시 칸트의 永久平和論(영구평화론)이 시도한 世界觀(세계관)을 다시 음미해볼 때가 왔다고 생각된다. 이 地上(지상)世界(세계)에서 對立(대립)鬪爭(투쟁)을 지양하고 人類(인류)共榮(공영)의 평화적 세계는 어떻게 하여 성취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人類(인류)에게 부과된 이 과제를 풀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칸트의 哲學(철학)을 회고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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