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文化(정신문화)의 理解(이해) 强調(강조)

  物質文明(물질문명)이 極度(극도)로 發達(발달)한 오늘날 經濟的(경제적) 不況(불황)이 닥치자 정신적 不安(불안)이 휩쓸어 세계는 物質(물질)에 대한 懷疑(회의)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物質(물질)의 不足(부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정신적 자세의 확립일 것이며, 이러한 정신적 자세확립은 또한 올바른 文化觀(문화관)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원래 物質(물질)은 外部的(외부적) 蓄積(축적)에서 오는 것이므로 文明(문명)을 낳지만 精神(정신)은 內部的(내부적) 涵養(함양)이므로 文化(문화)를 낳는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西歐(서구)文明(문명)을 한없이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物質的(물질적) 生活手段(생활수단)이 편리하기 위해서이지 그들의 內部的(내부적) 精神文化(정신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또한 精神文化(정신문화)는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物質(물질)의 이용은 洋(양)의 東西(동서)가 다를 바 없지만 精神的(정신적) 자세는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見解(견해)는 文化(문화)를 이해하려는 분이 中國(중국)의 碩學(석학) 錢穆(전목)敎授(교수)다. 그는 著書(저서) 文化學大系(문화학대계)와 中國文化史導論(중국문화사도론)에서 밝히고 있다. 文化學槪論(문화학개론)은 金敬琢(김경탁)敎授(교수)가 文化學槪論(문화학개론)이라 하여 번역했고 中國文化史導論(중국문화사도론)은 筆者(필자)가 中國文化史(중국문화사)라 하여 飜譯(번역)한 바 있다) 여기서는 이 두 著書(저서)를 中心(중심)으로 그의 文化觀(문화관)을 整理(정리)하여 우리의 精神的(정신적) 餘裕(여유)를 가져보려 한다.
  모든 문제는 文化(문화)問題(문제)에서 산출되는 것이요, 모든 문제는 문화문제에서 해결되는 것이라 하여 文化(문화)를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삼았다. 文化(문화)란 바른 인류생활이므로 어떤 개인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 대중적인 인류생활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문화는 하나의 종합체라 하였다. 다시 이러한 종합적 인류생활을 세 단계로 분류하여 보았다.
  첫째 물질적 人生(인생)이라 하여 자연적 인생이니 경제적 인생이니 하여 의식주 등 人生(인생)이 맨 먼저 경험해야 하는 첫 단계로 이것이 문화의 제 1단계라 했다. 둘째는 社會的(사회적) 인생이다. 이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많은 進化(진화)를 경험하면서 일어나는 文化(문화)의 제 2단계라 하였다.
  셋째는 精神的(정신적) 人生(인생)이다. 관념이나 理性的(이성적) 취미에 속한 宗敎(종교) 文學(문학) 藝術(예술) 등 文化(문화)의 第三(제삼) 단계라 하였다.
  이러한 세 단계의 人生(인생)을 다시 그 生活(생활)類型(유형)으로 갈라 세 가지 유형으로 分類(분류)하여 遊牧(유목)·農耕(농경)·商業(상업)이라 하고 이것을 다시 그 生活方式(생활방식)의 類似點(유사점)에서 遊牧(유목)과 商業(상업)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하여 二大(이대) 文化圈(문화권) 안에 두었다. 이러한 基準點(기준점)으로 中國(중국)文化(문화)를 보아 農耕文化(농경문화)를 보아 農耕文化(농경문화)의 대표적 발전이었다고 한 것이 그의 中國(중국)文化(문화) 導論(도론)이다. 이 두 유형의 문화적 對立(대립)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이러한 대립을 이룬다하더라도 거기에는 각각 文化(문화)의 일곱가지 요소가 있으니, 經濟(경제), 科學(과학), 政治(정치), 藝術(예술), 文學(문학), 宗敎(종교), 道德(도덕)이 그것이다. 따라서 中國(중국)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은 정치, 도덕, 문학, 예술에 있고 西歐(서구)에서 중히 여긴 것은 경제 과학 종교였고, 印度(인도)에서 소중히 여긴 것은 종교 예술 문학에 있다. 이와 같은 모든 요소를 가지면서도 어느 한 쪽에 편중되므로 西歐人(서구인)이 外向的(외향적) 정복인 과학에다 承服(승복)을 요구하는 종교정신까지를 바라니 이것은 하나의 內在的(내재적) 모순을 안고 있고 中國(중국)에서는 科學(과학)과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허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단점이자 특성은 文化(문화)가 인류생활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볼 때 자연 지리적 생활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지리적 배경으로 분석해 본 것이 그의 中國文化觀(중국문화관)이다.
  그는 中國(중국)文化(문화)의 특성은 農耕(농경)에서 온다고 보았다. 흔히 말하는 黃河文明(황하문명)이라하는 黃河(황하)는 支流(지류)가 많고 그 支流(지류)가 主流(주류)와 합쳐지는 三角洲(삼각주)일대가 교통이나 灌漑(관개)가 편리하여 農耕(농경)에 적합했으며 人口(인구)集中(집중)이 쉬워 여기에 農耕(농경)에 적합한 文化(문화)가 탄생하였다.
  氣候(기후)도 溫帶(온대)에 속하기 때문에 생활하기가 편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西歐(서구)는 큰 강의 유역이 넓기는 하나 農耕(농경)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자연 遊牧(유목)이나 商業(상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遊牧(유목)이나 商業(상업)의 시초는 平原(평원)이 아니라 海岸(해안)이나 島嶼(도서)지방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 이것은 海賊(해적)이나 隧商(수상)이라는 用語(용어)에서도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農耕(농경)이란 一定(일정)한 곳에 常住(상주)해야 했기에 內在的(내재적)이고 靜的(정적)이나, 遊牧(유목)과 商業(상업)은 移動(이동)을 해야 하며 外向的(외향적)이고 動的(동적)이라야 한다. 農耕(농경)이란 生産(생산)에 限定(한정)이 있다.
  守分安足(수분안족)이라는 소극성을 떠나, 遊牧(유목)과 商業(상업)은 等比級數的(등비급수적) 증가를 요하며 부족을 느끼고, 戰爭(전쟁)과 克服(극복)의 관념을 갖게 한다. 農耕(농경)은 자연에 순응해야하니, 天人合一(천인합일)이요 物我一體(물아일체)이나, 遊牧(유목)과 商業(상업)은 자연의 정복이니 物我(물아)는 對立(대립)이요 空間的(공간적) 확장이 된다. 一例(일례)를 家族制度(가족제도)에서 보더라도 東洋(동양)은 일정한 農地(농지) 중심의 자자손손이 계승하는 內向的(내향적) 大家族(대가족)이나 西歐(서구)의 商業(상업)文化(문화)는 外向的(외향적) 확산인 核家族(핵가족)으로 발전한다. 中國(중국)史上(사상) 상업의 번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西歐(서구)의 상업이라는 그 방향이 달랐다.
  중국은 하나의 農業國(농업국)으로 일찍부터 統一(통일)된 國家(국가)의 形態(형태)를 갖추고 있어 商業(상업)이란 다만 對內的(대내적) 通商(통상)이지 貿易(무역)이라 말할 수 있는 對外性(대외성)이 없었다. 그러나 西歐(서구)의 여러 나라에서는 對外的(대외적) 通商(통상)에 重要性(중요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東洋(동양)에서는 商業(상업)勢力(세력)의 지나친 팽창은 法令(법령)으로 억제하였다.
  科學(과학)만 하더라도 東洋(동양)에 科學的(과학적) 정신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정복을 위한 기계생산에 집착할 필요가 많지 않았다. 자연에 順應(순응)하여 農地(농지)의 耕作(경작)으로 생활이 영위되기 때문에 생활의 여유를 높이는 예술적 방면으로 과학을 이용하게 되었다. 즉 생활주민의 흥을 돋우는 玩賞物(완상물)을 만드는 것이 과학정신의 발휘였다.
  그러므로 工藝(공예)라는 말은 있어도 工業(공업)이란 말이 없다. 다시 말하면 오늘 물질문명을 발달시킨 것과 같은 科學(과학)이란 應用(응용)될 만한 기회가 없었다.
  또한 西歐人(서구인)이 이상으로 여기는 自由(자유)란 말도 東洋人(동양인)에게는 별로 필요가 없었다. 西歐人(서구인)은 外向的(외향적) 공간적이기 때문에 彼我(피아)의 對立(대립)이 생기고 정복과 극복이 늘 뒤따른다. 그러므로 소아의 보호를 위한 자유와 공간적 집단을 위한 연합이란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것들의 대표적인 것이 그리이스의 자유와 로오마 교회의 조직과 연합이다. 그러나 농경문화의 內向的(내향적) 시간적인 文化生活(문화생활)에서는 個體(개체)와 社會(사회)를 혼연한 一體(일체)로 보기 때문에 彼我(피아)의 구별이 없었다.
  自然(자연)은 즉 自我(자아)고, 小我(소아)는 自然體(자연체)의 核心(핵심)이 되어 天人(천인)合一(합일)이라는 圓熟體(원숙체)가 된다. 이러한 생각을 體系化(체계화)한 것이 ‘大學(대학)’에서 말하는 八條目(팔조목) 즉 修身(수신) 齊家(제가) 治國(치국) 平天下(평천하)의 관념이다.
  다시 宗敎(종교)를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이러한 天國(천국)이나 인간세상의 대립관념이 없으므로 이 세상은 하나라고 보기 때문에 또 다른 천국을 두어 永生(영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고 永生(영생)이 있다면 現世(현세)에서 잊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秦始皇(진시황)이 不死藥(불사약)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現世(현세)지향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西洋(서양)에서 보는 것과 같은 宗敎(종교)는 다만 倫理(윤리)로서만 발전한다.
  儒敎思想(유교사상)은 이러한 倫理觀(윤리관)을 宇宙觀(우주관)으로 融化(융화)시킨 것이다. 道家(도가)思想(사상)이 인간에게서 客體化(객체화)한 신선을 생각하여 人世(인세)와 天國(천국)을 인식하려한 듯도 하지만 끝내 肉(육)과 靈(령)이라는 二元的(이원적) 입장이 되지 못했고 西洋(서양)의 宗敎(종교)와 같은 것이 되지 못했다. 끝내 天人合一(천인합일)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또한 높은 次元(차원)의 宇宙觀(우주관)도 보였지만 客體的(객체적) 입장으로 분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西歐(서구)와 같은 과학으로 발전시키지도 못하였다.
  國家觀(국가관)이나 民族觀(민족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넓은 하늘 밑에는 王(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 ‘普天之下(보천지하) 莫非(막비)(主臣(주신))’라는 개념은 쉽게 統一國家(통일국가)로 형성시킬 수가 있었고 주위에 있는 異(이)部族(부족)도 쉽게 融和(융화)시킬 수가 있었으니 滿洲(만주)部族(부족)까지도 그들에게 융화된 것은 그 좋은 一例(일례)다. 그들이 말하는 華廈(화하)나 蠻夷(만이)라는 말은 部族的(부족적) 개념이기보다는 文化人(문화인)과 野蠻人(야만인)의 개념에 가깝다. 아무리 異(이)部族(부족)이라 하더라도 일단 그들의 文化生活(문화생활)에 젖으면 華廈(화하)의 부족과 달리 생각지 않는다. 그 하나의 예가 우리나라를 가리켰다는 東夷(동이)라는 말도 黃河(황하)文明(문명)이 아직 東進(동진)하지 못했던 古代(고대)에는 山東省(산동성)이나 遼東(요동)일대를 가리켰다.
  그러나 周(주)의 部族(부족)이 商(상)의 뒤를 이어 東進(동진)하면서 華廈(화하)의 諸(제)部族(부족)과 同和(동화)된 것이다. 周(주)의 후예이자 東夷人(동이인)이었던 孔子(공자)가 周公(주공)을 그토록 사모했던 것도 이러한 血緣的(혈연적) 私情(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中國(중국) 고대의 학술적 성과를 보더라도 ‘詩經(시경)’은 文學(문학)의 宗主(종주)였다 할 수 있다. 여기에 수록된 많은 民間(민간) 歌謠(가요)는 당시 사람들의 倫理觀(윤리관)을 자연적 조건위에서 가장 진지하고 평화스러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간혹 임금의 開國(개국)에 따른 英雄譚(영웅담)이 있기는 하나 이것도 사실에 가까운 것이고 西歐(서구)의 서사시와 같은 영웅의 전쟁담과 같은 것이 아니다.
  文學(문학)과 倫理(윤리)가 한데 융합된 특징이고 詩(시)와 禮(예)와 樂(낙)을 중시하는 한이기도 하다. 최고의 哲學書(철학서)라 할 수 있는 易經(역경)도 文學(문학) 내지는 예술이라 말할 수 있다.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하는 人生(인생)의 온갖 일을 간단한 부호의 결합으로 상징시켜 현실의 吉凶(길흉)을 판단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생활과 직결되는 倫理觀(윤리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倫理(윤리)는 孝(효)·弟(제)·忠(충)·智(지)라는 正道(정도)를 가추고 仁(인)·義(의)·禮(예)·智(지)의 사람 되는 조건을 준수하려 한다.
  中國(중국)에 종교는 없지만 外來宗敎(외래종교)를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용납하고 包容(포용)하여 더욱 발전시킨 것도 이러한 正道(정도)를 준수하여 바른 사람이 되면 나도 天堂(천당)이나 極樂(극락)에 갈 수 있는 것이고 남이 하나님과 신을 믿어 善行(선행)을 한다면 굳이 반대하고 투쟁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이와 같이 모든 思想(사상)이나 생활방편이 독특한 文化(문화)의 배경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때 우리는 좀 더 精神文化(정신문화)의 이해에 주목을 해야 하겠다. 더구나 우리는 風土的(풍토적) 與件(여건)이 같은 中國文化(중국문화)와 同質化(동질화)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우리 文化(문화)를 올바로 이해할 수가 있고 앞으로의 精神的(정신적) 방향도 확립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런 見地(견지)에서 錢穆(전목)씨가 밝힌 文化觀(문화관)을 이해하기 위하여 文化學槪論(문화학개론)과 中國文化史(중국문화사)를 권한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