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 마인드와 자신감에 투자하라”
금융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꿔볼 은행장의 자리에 오른 민병덕(경영학과 81 졸) 동문은 금융계의 대표적인 ‘영업의 달인’으로 불린다. 불가능해보일 것 같은 일도 그에게 맡겨지면 가능해지는 금융계의 마이더스의 손. 민병덕 동문을 만나 그의 학창시절 이야기와 그가 꿈꾸는 한국 금융의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라는 영국 속담이 있다. 이는 어떤 사람이든 고난과 역경(逆境)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견뎌낸다면 비로소 인정받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끊임없는 노력과 끈기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선 한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평범한 은행원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은행인 KB국민은행의 최고 경영자가 된 민병덕(경영81졸) 동문이다.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라는 영국 속담이 있다. 이는 어떤 사람이든 고난과 역경(逆境)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견뎌낸다면 비로소 인정받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끊임없는 노력과 끈기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선 한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평범한 은행원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은행인 KB국민은행의 최고 경영자가 된 민병덕(경영81졸) 동문이다.금융인으로서의 첫걸음
민병덕 동문이 처음 금융인의 꿈을 갖게된 것은 경영학도로서의 의무감 때문이었다. 그는 단순히 경영학 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금융업계나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4학년에 재학 중이던 해에 한국투자신탁이라는 금융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그는 회사 내부사정으로 인해 입사한 지 1년 만에 지금의 국민은행으로 이직하게 됐다.
민병덕 동문은 “당시 지금의 직장으로 이직한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 IMF사태가 발발했던 90년대 말, 많은 금융기업이 위기를 겪었지만 국민은행은 정부투자기관으로서 당시의 위기사태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단 직원에서 은행장으로
지난 7월, 은행장으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딛은 민병덕 동문. 기업의 말단 직원으로 입사해 지금의 자리에 있기까지 성공을 향한 도전에 큰 힘을 실어준 것은 바로 그의 긍정적인 마인드와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근무조건이 좋지 않은 지점으로 발령받았을 때도 실적을 올리겠다는 목표와 의지하나로 좋은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다”고 말하는 민 동문은, 직책이 높아지면서 어려운 일도 많아졌지만 그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통해 극복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민 동문은 이러한 노력에 대해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목표를 분명히 알고 이에 대해 충분히 준비한다면 그것을 이루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탓인지, 민 동문은 기업 안팎에서 ‘영업의 달인’으로 인정받게 됐고, 동료 직원들로부터도 신임을 얻게 됐다.
민 동문의 노력과 더불어 그의 뛰어난 사교력 또한 그가 영업의 달인(達人)으로 불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0분만 대화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든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민 동문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 또한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노력 덕분에 민 동문은 점차 회사에서 인정받기 시작했고, 직원과 동료들의 힘을 입어 영업본부장, 영업담당 부행장을 거쳐 어느덧 사원 2만 7천명을 움직이는 한 은행의 은행장이 되었다.
이제 취임 약3개월을 맞는 민 동문은 “취임 초기에는 직원과 이해관계인들의 조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며 “현재는 고객의 수요가 급변함에 따라, 고정관념의 탈피를 통해 발빠르게 앞서나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라고 말했다.
휴교,시위로 어수선 했던 학창시절
어린 시절 그는 집안 사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절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던 중 건강이 악화돼 집에 돌아오게 됐고,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학생들의 교복 입은 모습이 부러워 삼일 밤낮 끈질기게 어머니를 설득한 끝에 결국 다시 학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불교 신자인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동국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동국대에 입학한 민 동문, 하지만 그가 재학 중이던 70년대 말, 80년대 초는 12.12사태, 광주민주화운동 등 국가적 억압과 이에 대한 데모가 많았던 때였고, 자연스레 학업보다는 시위참여가 그의 학창시절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민 동문은 “그때 당시 데모 참가와 더불어 휴교가 많아져, 사실 수업을 들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며 “리포트로 수업을 대체하기 일수였고, 학교에 가는 날에는 친구들과 명진관 앞에서 고량주를 먹으며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 동문은 이러한 학창시절 속에서도, 조희영 교수님에 대한 추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당시 서울역 광장에 집결했을 때, 제자가 다칠까봐 데모 현장까지 따라와 걱정해 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교수님이 독일에서 공부하고 오셔서 한국말이 서투르셨지만, 극진(極盡)한 제자사랑만큼은 가슴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조 교수님과 연락하며 당시의 추억을 회상한다고 한다.
자신감이야 말로 젊은이의 자산
민 동문은 자신은 비록 4년의 대학생활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채 보냈지만, 지금 후배들은 그 시간을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데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췄다. “대학에서의 4년은 절대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 속에서 어떠한 성과를 이뤄냈느냐에 따라 인생이 좌우 된다”고 말하는 민동문.
또 그는 목표를 위해 열심히 정진하고 있을 후배들에게 의지와 열정으로부터 이뤄지는 끊임없는 준비와 노력을 강조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아가며 실패는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그는, 늘 지금보다 한 단계 높은 곳을 바라보며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으로 노력한다면, 언젠가 반드시 그곳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후배들에게 “목표를 위해 정진하는 학생들이라면 항상 ‘나는 할 수 있다, 이까짓 것 못하겠느냐’는 마음을 품고 자신감 있게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금융시장을 누빌 수 있는 국민은행을 만들기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민병덕 동문. 현재 국민은행은 2만 7천명의 직원이 2천 6백만 국민의 자산을 관리하고 있으며, 총 자산은 256조원에 달한다. 이런 천문학적 액수를 운영하는 국내 최대 은행의 대표라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짐을 짊어진 민 동문이지만, 그가 가진 끈기와 노력이 변치 않는 한, 그가 그려갈 미래는 지금까지의 나날보다 더욱 밝게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