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기개의 선비이자 한국 시의 큰 봉우리

“투명하고 예리한 감성, 밝은 지성, 윤택한 정서를 통하여 한국 현대 시사에 하나의 불멸한 업적을 남긴 시인.” 청록파 시인 박두진이 동탁 조지훈을 평한 말이다. 우리 겨레가 애송하는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며‘국민시인’으로 불리고 있는 동탁 조지훈, 그의 시 세계를 조명한다.

잊혀지지 않을 조지훈 선생과의 만남

벌써 삼십여 년 저쪽 1965년경 일이다. 당시 국문학과 3, 4학년생이던 조정래, 박제천, 문효치, 그리고 필자 등등 글쓰기에만 매달렸던 우리들은 동국문학회란 동아리를 갓 출범시켰다. 그동안 창작문학회, 용운문학회, 동대문학회, 다다 등등의 전공별 동아리 모임들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그리고 그 통합을 기해 우리는 조지훈(1920~1968)선생을 초빙해 특강을 듣기로 했다.

특강은 많은 학생들이 참여한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그 무렵만 해도 문학은 인문학의 중심일 뿐 아니라 사람들 일상에도 깊숙하게 녹아있었다. 교양이나 글 읽기의 다른 이름처럼 문학이 대접되던 때였다. 그런 시대 분위기 탓에 문학의 밤이나 문인의 특강 같은 행사는 곧잘 성황을 이루곤 했다. 지금과는 너무 다른 세태였던 셈이다.

특강 내용은 이제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그 무렵 처음 본, 시인 조지훈의 풍모는 아직도 내게 뚜렷하고 선명하게 떠오른다. 지훈 선생은 긴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빗어 넘긴 올백스타일에다 후리후리한 큰 키에 단장을 짚은, 그러면서도 중후한 중년신사의 모습이었다.

강연 뒤 뒤풀이 자리는 자연스레 술판으로 바뀌었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는 “선생님 모교로 오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하는 질문까지 던졌다. 그 질문에 선생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고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는 뜻을 에둘러 말씀하기도 했다. 선생은 그 무렵 고려대에 재직 중이었다. 해방 후 잠시 모교인 동국대에 출강(1946)을 하다 고려대로 직장을 옮겨가신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지훈 선생은 까마득한 후배 학생들의 응석에 가까운 그 물음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지금 보면 선생은 그 무렵 한국학연구에 더 잠심하고 있을 때였다. 재직학교의 민족문화연구소 초대소장을 맡아 ‘한국민족운동사’를 집필 중이었던 것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지훈 선생은 이 무렵 시와는 일정거리를 둔 채 한국학 연구에 더 몰두했다. 이 연구의 대강은 ‘한국문화사 서설’에서 밝힌 그대로 국어학, 고전문학, 민속학, 역사학 등등에 걸친 방대한 규모의 것이었다. 그러나 지훈 선생의 한국학연구자로서의 면모는 이 글 성격 밖의 일이어서 아쉽지만 여기서 더 길게 말할 수 없을 터이다.

‘완화삼’에서 나타난 초기 시 경향

지훈 선생의 고향인 경북 영양 주실에 가면 마을 앞산에 작은 시비가 서 있다. 그 비석에는 작품 ‘완화삼(玩花衫)’이 음각돼 있다. 일제 말인 1942년 봄 경주로 내려가 초면의 박목월을 만나 건넨 작품이라는 이 시는 어쩌면 우리 근대시의 절창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시인 지훈의 초기작품인 이 시는 박목월의 ‘나그네’와 짝을 이룬다.

멀리서 오는, 그것도 일면식도 없는 초면의 시 벗을 ‘조지훈 환영’이란 깃발 하나 달랑 들고 경주 기차역에서 기다린 목월에게 지훈은 이 작품을 말없이 건넨다. 이 때 목월이 건넨 작품은 ‘밭을 갈아 콩을 심고’였다. 흔히 ‘완화삼’의 화답시로 알려진 ‘나그네’는 이 만남 뒤 그 뒷날의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시적 발상이나 이미지가 너무 유사하다. 그런 탓에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며 함께 사랑받았을 것이다. 산수그림과 관련된 옛말에 ‘와유지취(臥遊志趣)’란 말이 있다. 지난 날 생각 속 이상공간을 그린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을 일컫는 말이다. 그림 앞에 눕거나 앉아 산수를 구경하며 감상자는 웅숭깊은 그림의 뜻을 새긴다.

이때의 산수는 대개 관념 산수화로 불리는 것들. 나는 시 ‘완화삼’이나 ‘나그네’의 공간 역시 관념 산수화의 이상화된 공간임을 생각한다. 이들 작품의 강과 산이란 현실 어느 곳의 진경산수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 같은 사실이 시를 읽는 이의 울림을 더욱 크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해방공간에서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단한 반향을 불렀던 삼인시집 ‘청록집’에 나타난 공간적 특성이란 대개 이런 것일 터이다. 그것이 진경산수가 아니기에 잘못됐다는 생각은 폭 좁은 것이리라.

지사적 풍모와 기개 지닌 시 세계

아무튼 지훈 선생의 초기 시들은 ‘완화삼’의 예에서 보듯, 주로 고전적 문물을 시적 대상으로 취한다. 그러면 지훈 시의 고전적 문물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가. 예컨대 고궁 임금의 옥좌를 제재로 한 ‘봉황수’, 전통 옷을 다룬 ‘고풍의상’, 불교 의식의 춤을 그린 ‘승무’ 등등이 모두 그것이다. 이는 해방공간에서 동향인 청량산인 이원조(李源朝)로부터 봉건적 회고적 취향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일련의 작품들은 당시 문장(文章)지에서 모두 정지용의 고평을 들으며 추천된 작품들이기도 했다. 뒷날(1946년) 청록집이 나온 후 발행인 조풍연이 마련한 술자리에서 정지용은 ‘내가 얼마나 무서운 호랑이 새끼들을 길러냈는가는 아무도 모를 거야. 추천을 해줘도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적어 보낸 자가 없었어. 흔한 연하장 하나 보낸 자도 없고. 지독한 놈들이야.’라고 이들 세 시인의 기개를 우스개 삼아 자랑했다고도 한다.

특히 지훈 선생은 유교적 가풍 그대로 올곧은 선비의 면모를 일생동안 보여주었다. 그가 ‘순수시’를 새롭게 건설할 민족문학의 한 축으로 해방공간에 내세웠고 4·19 혁명 후엔 ‘지조론’으로 지사적 풍모와 기개를 과시한 일등이 그것이다. 시세계 역시 한국전쟁을 통과하면서 강한 현실의식을 드러냈다.

말하자면 시 세계의 획기적 전환을 한 것이다. 시가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나아갔다면 이 무렵 전통에 관한 각별한 의식은 웅숭깊고 폭 넓은 한국학 연구로 나간 것이다. 시비가 있는 영양 주실에는 아직도 그의 생가가 남아있다.

전통적인 와가(瓦家)로 지훈 선생은 이 집에서 1936년 첫 서울 나들이 때까지 조부 조인석에게 한학을 배웠다. 그런가 하면 시를 썼던 가형 세림(世林) 조동진과 소년회를 조직하고 동인지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같은 자취가 낡아가는 생가와 시비로만 이 고장에 남아있을 뿐이다.

‘시인 공화국’ 밑거름 된 조지훈

지훈 선생이 모교 혜화전문에 입학한 것은 1939년이었고 졸업은 41년이었다. 그런데 이때 그는 이미 ‘문장’지(誌)에서 추천을 받기 시작한 당당한 학생 시인이었다. 재학기간 중에 등단을 하는, 그래서 학생 문인으로 우뚝 서던 모교의 전통에 지훈 선생 역시 한축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 전통은 지난 1960년대에 ‘시인 공화국’이란 말로 모교가 불리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지훈 선생은 한국시의 큰 봉우리이자 모교 시의 대간을 이루는 만해, 미당, 신석정 등을 잇는 지난 세기 중반의 대표적 시인이다. 특히 그의 선불교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시세계는 모교의 학풍을 빼놓고서는 말하기 어려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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