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시)가 인간의 救援(구원)이 되는가하는 물음에 대해서 그리 쉽게 긍정할 사람은 오늘날 없다. 이유야 여하튼 단지 當爲(당위)로서 혹은 소망으로서 수긍할 뿐 이 시대가 곧 그 구원이 되고 있다고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詩(시)는 왜 쓰는가? 이 시집에는 30년을 침묵해 온 시인의 거기 대한 피맺힌 답으로 충만해 있다.
  그것은 먼저 <미안해서>라고 시인은 답한다. <미안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웃에 대한 괘념이자 휴머니티의 모태가 된다. 그것이 곧 共同體的(공동체적) 樣式(양식)에 대한 관심이요 또 자신의 소재를 명확히 파악하고자 하는 知性(지성)이다. 지성이란 다름 아닌 <나 혼자만>의 사상에서 해방되는 곳에서 비로소 눈뜨는 것이기 때문이다.

  <퇴근 후/전라도産(산) 돗자리를 깔고/夕刊(석간)을 펴>고 <저녁상과 반주잔이 들어오면/아껴 놓았던 運命(운명) 第一樂章(제일악장)을 틀어놓고/나는 드디어 皇帝(황제)가 된다./돈도/權座(권좌)도/敎主(교주)의 아들도/부러울 것 없다./다만 좀 미안할 따름이다./이래도 좋은가/皇帝(황제)도 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미안할 따름이다.>(退勤(퇴근) 後(후))

  두 번째 답은 답답함을 면하기 위해서라고 시인은 은연중에 말한다. 답답함을 면하고자 하는 행위는 그대로가 카타르시스가 된다. 요샛말로는 消散反應(소산반응)이 된다. 가슴 속에 응어리가 되어 사람을 괴롭히는 그 抑鬱狀態(억울상태)의 원인을 제거하는 행위가 된다. 말하자면

<송글 송글/귓바퀴에 솜털 열일곱/귀여운 少女(소녀)들 앞에/눈망울 채워 줄 답이 없>고 <내가 왜 그들을 슬퍼하는가를/말할 수 없>으며, 또 <꿈을 주고/사랑을 가르쳐야 할 내가/왜 그렇게 못하는가를/어째서 푸른 하늘의 한쪽이/밤인가를 말할 수 없>(少女(소녀)들에게) 어서 시를 쓰는 것이다.
  그것은 드디어 自由(자유)에의 갈망으로 피어나는 것이니 그것이 시인이 시를 왜 쓰는가에 대한 세 번째 답이 된다. 어느 날 <아우성이 海溢(해일)이 되어/海溢(해일)같은 깃발이 되어/어느 절벽에 부서졌을/물거품의 悲願(비원)으로/忽然(홀연)히 터져버린 渴望(갈망)>(石榴(석류)꽃)으로 실현되기를 믿는 신념이 그에게 있기 때문에 그는 오늘도 <의자처럼 기다리며 살 수>(倚子(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가 손쉽지 않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시편 <自由(자유)>는 이 시집에 실린 四十三(사십삼)편의 알맹이만을 골라 쌓아올린 白眉篇(백미편)이다.
  폴․발레리는 <텍스트氏(씨)와의 하룻밤> 이후 일체 침묵을 지키다가 20여년 만에 <젊은 파르크를 上梓(상재)함으로써 시단에 복귀하고 마침내 20세기 최고의 知性(지성)으로 추대되었지만 이 시인은 <防空壕(방공호)> 이후 꼭 30년만에 시집 한 권을 내놓으면서 우리들 가슴을 흔들어 준다.
  그는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詩(시)를 생각하고 詩(시)를 써왔던 것이다. 그것은 꼭 그의 處女詩(처녀시) <防空壕(방공호)>의 그 <갓난이>의 黃土(황토)를 파는 행위와도 흡사하다. 누가 말했던가. 詩(시)야말로 영원히 의로운 행진이라고. 앞으로의 精進(정진)을 바라면서 <防空壕(방공호)>의 마지막 한 구절을 다시 한 번 외워본다.

  갓난이는 동무가 없어
  머언시절의 도랑가가 그리워
  혼자서 누런 黃土(황토)를 판다.

(韓一出版社(한일출판사) 刊(간)․값 1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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