絶望(절망)하는 힘

  1949년 16세 때 晉州(진주) 農林學校(농림학교) 在學(재학) 時(시) 未堂(미당) 徐廷柱(서정주) 선생의 推薦(추천)으로 ‘文藝(문예)’誌(지)를 통해 데뷔했다.
  詩作(시작)生活(생활) 이외에 評論(평론)에도 關心(관심)을 기울인 李(이) 同門(동문)은 제 3 詩集(시집)인 ‘꿈꾸는 旱魃(한발)’로 76년도 第(제) 8 回(회) 韓國詩人(한국시인)協會賞(협회상)을 지난 13일 수상했다.
  ‘그의 詩(시)는 피 묻은 고뇌의 詩學(시학)이고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얻은 니힐리즘의 絶頂(절정)’(解說文(해설문) 中(중))이라고 한 것 같이 그는 ‘나이가 들면 쇠약해지는 것은 육체의 힘이 아니라 絶望(절망)하는 힘’이라고 ‘에밀 시오랑’의 말을 인용한다.

  ◇略歷(약력)
  ▲1933년 慶南(경남) 晉州(진주)에서 출생
  ▲1950년에 ‘文藝(문예)’誌(지)에 추천
  ▲1956年(년) 東大(동대) 佛敎科(불교과) 卒(졸)
  ▲1957년 제 2회 韓國文協賞(한국문협상) 수상
  ▲詩集(시집)으로 ‘寂寞江山(적막강산)’, ‘돌베개의 詩(시)’, ‘꿈꾸는 旱魃(한발)’ 외에 評論(평론) 多數(다수)
  ▲현재 부산 國制新報(국제신보) 編輯局長(편집국장)을 거쳐 論說委員(논설위원)


  근검절약으로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교과서 이외의 책은 사주지 않았다. 교과서 이외의 책은 공부에 방해가 될뿐더러 쓸데없는 돈의 낭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소년소설이나 소년 잡지 같은 교과서 이외의 책들만을 탐독했다. 수업시간에도 책상 밑에 몰래 그런 책을 펴놓고 읽다가 선생님한테 자주 야단을 맞았다. 집에서는 한 권도 사주지 않은 책들을 어찌 그렇게도 많이 구해 읽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신기할 지경이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란 격언의 한 적용 예가 될는지 모르겠다.
  그런 책을 읽는 동안 나의 가슴속엔 장차 作家(작가)가 되리라는 꿈이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文壇(문단) 데뷔가 비교적 빠른 편이다. 徐廷柱(서정주) 선생의 추천으로 시 <비오는 날>이 처음으로 <文藝(문예)>지에 발표된 것은 1949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6년제) 5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는 서울 구경을 해본 일이 없고 또 徐(서) 선생도 만난 적이 없다. 論介(논개)의 고장으로 이름은 나 있지만 인구는 10만 미만이었던 小邑(소읍) 晉州(진주)에서 살았을 뿐이다. 그런 시골에서 투고한 일개 중학생의 시가 大家(대가) 未堂(미당)의 눈에 들어 당시로선 가장 권위 있는 문학지의 추천의 관문을 거쳤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더구나 그 작품은 쓸 때 아주 고심을 했거나 그래서 좀 자신이 있다거나 한 것이 아니고 일종의 호기심으로 덮어 놓고 투고를 해 본 것에 불과하다. 盲人不恐蛇格(맹인불공사격)인 투고였다 할까. 그런데도 추천을 받은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마침 12월 호에 발표된 그 작품을 두고 趙演鉉(조연현) 선생은 바로 그 다음달, 그러니까 新年號(신년호)에 지난해 문학의 總評(총평)을 쓰면서 전도가 유망하다고 好評(호평)을 해준 것이다. 나는 정말 하늘의 별이라도 딴것처럼 우쭐대고 기뻐했다.
  이처럼 데뷔가 빠르고 또 손쉬웠기 때문에 나에게는 데뷔 이전의 文靑(문청)들이 흔히 겪는 이른바 文學(문학)修業(수업) 기간이라는 것이 없다. 남들은 이런 나를 부러워했다. 그리고 한동안 나 자신도 그것은 마땅히 선망에 값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5~6년 흐르고 나니 그것이 아니었다. 수업 기간을 겪지 않았다는 것은 곧 그만큼 기초를 쌓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 무렵 나는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도무지 시가 써지지 않는 심한 슬럼프가 나에게 그러한 깨달음을 준 것이다. 자신의 재능과 역량이 한계에 달한 듯한 절망감을 되씹으면서 나는 속으로 徐(서) 선생과 趙(조) 선생을 원망했다. 풋내기 중학생의 바로 그 풋내 나는 재치를 너무 과대평가해 준 탓으로 그 중학생은 자기도취에 빠져 공부는 하지 않고 우쭐대다가 급기야는 오늘 이 지경이 되고만 것이 아닌가. 여기서 헤어나자면 이제부터 새로 데뷔 이전의 文靑(문청)으로 돌아가서 전에는 하지 못했던 문학 수업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문학개론부터 다시 읽자. 그리하여 나는 주로 理論書(이론서)를 읽기 시작했다.
  이론서를 읽다보니 자연 評論(평론)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그전에는 평론이란 그 안에 자기 이름이나 나와야 겨우 읽었던 글이다. 그러한 평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그 자체만도 소득이라면 미상불 소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막힌 詩(시)의 물고는 좀처럼 다시 터지지 않았다.
  안타까워하면서 책을 읽고 읽다가는 또 시를 생각하면서 나는 50년대의 후반을 시는커녕 다른 글도 거의 쓰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는 동안에 시에 대한 생각도 전보다는 많이 달라져 갔다. 하기야 슬럼프에 빠진 것 자체가 자기 시대에 대한 회의의 소치라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여태까지 써 온 그 자연 발생적 서정의 세계로는 하여간 다시 돌아갈 수 없고 또 돌아가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날로 굳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딱했다. 생각만 그랬을 뿐 ‘뮤즈’는 여전히 나를 보고 웃어 주진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공백상태를 너무 오래 끌고 갈수도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는 1년에 한 번 나오는 文人(문인)住所錄(주소록)에나 이름이 실리는 그런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신세를 면하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뭔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쓰기 시작한 것이 評論(평론)이다. 때는 60년대 초였다. 그 평론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무렵 내가 비교적 자주 읽은 것은 파스칼, 세스토프, 오스카 와일드, 小林秀雄(소림수웅) 등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은 객관적 분석이 아니라 주관적 鑑賞(감상)을 기본 방법으로 삼고 있는 主體派(주체파)에 속한다. 그들을 통해 나는 평론도 창작이란 사실을 배웠다.
  시를 쓰던 자가 평론에 손을 대니 시에 관한 것을 써보라는 주문이 더러 있었다. 주문이 없더라도 나 자신이 시에 관한 것을 써보고는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쓸 수가 없었다. 시에 대한 생각이 정립되지 못해 자기 시도 쓰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감히 남의 시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인가.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평론이 아니라 시를 쓰겠다. 그래서 내가 그 무렵 주로 쓴 평론은 소설에 관한 것과 일반론적 時評(시평)이다.
  그러나 시는 문학의 핵심이다. 문학의 핵심인 詩(시)에 대한 견해가 정립되지 못하고선 소설이나 일반론도 제대로 될 턱이 없다. 내가 쓴 평론은 그러니까 엉터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즘 어쩌다가 당시의 스크랩을 펴보게 되면 정말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이 많다.
  엉터리는 엉터리라도 계속 뭔가를 쓴다는 것은 역시 의미가 있는 일인 모양이다. 10년 가까이 평론을 쓰는 동안 어느새 나는 새로 쓸 시의 윤곽을 잡아가고 있었다. 하긴 계속 뭔가를 쓰다보면 최소한 원고지를 메꾸기 위해서도 자기 나름으론 공부를 해야 하고 또 이것저것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다시 시를 쓸 수 있게 된 것은 그 餘德(여덕)일 것이다. 이번에 낸 세 번째 시집 <꿈꾸는 旱魃(한발)>은 그렇게 해서 얻은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이 경험을 나는 귀중한 교훈으로 알고 있다. 슬럼프를 극복하는 길은 혼자 끙끙 앓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뭐든 덮어 놓고 쓰는데 있다는 교훈이다.
  그럼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꼭 밝혀두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보들레르와의 만남이다. 전에는 읽어도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惡(악)의 꽃>이 어느 날 갑자기 충격적인 섬광을 던졌다. 그 일순의 번쩍임이 부각시킨 정신공간의 풍경은 내가 다시 시를 찾는데 있어 결정적인 길잡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희는 아니었다. 오히려 처참한 절망의 확인이었다. 그 절망의 의미를 설명하는 말로서는 에밀 시오랑의 斷章(단장)의 한 구절이 적절할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쇠약해지는 것은 육체의 힘이 아니라 절망하는 힘이다.’ 보들레르는 나에게 절망하는 힘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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