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때의 정치행태와 정치제도를 생각할 때마다 중국 명나라의 건국자인 주원장을 떠올리게 된다. 주원장은 중국의 역사 속에서도 가장 전제적인 군주로 꼽힌다. 그가 만든 갖가지 정치제도와 운영을 역사가들은 흔히 ‘황제독재체제’ 라고 부른다. 그는 방대한 양의 행정서류를 직접 읽고 결재하고 감찰기구를 설치해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조작했다. 조정의 대신이라 할지라도 그의 비위를 거스리면 조정에서 공개리에 볼기를 때리는 망신을 주었다. 행정을 직접 챙기고, 정보기구를 통해 정보를 조작함과 동시에 언론을 탄압하고, 폭력으로 그의 독재체제는 성립했던 것이다. 주원장은 원명교체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회복하였으며 중국을 재통일하는 데에 성공했다. 따라서 그의 황제독재체제는 ‘개발독재’형의 성공을 거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박정희는 국가의 모든 현안을 직접 챙겼다. 그가 경제개발 프로젝트를 강력히 추진해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우리 민족의 오천년 가난을 씻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를 두어 정보의 조작과 독점, 언론 탄압, 공작정치 역할을 하게 했으며, 양 기관을 서로 견제하게 했다. 또 청와대 비서실은 행정부의 장관 위에 군림하였으며 청와대 경호실장은 제 2의 권력을 누렸다. 이것은 바로 측근정치·비서정치로 독재 권력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박정희와 주원장이 똑같이 정보·공포·폭력·측근정치를 이용한 독재정치를 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600년의 시차를 뛰어넘는 공통점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고 개발독재의 효용성과 한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주원장 정권은 지나치게 중앙집권화를 추구했고 이는 훗날 지방의 소외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중앙과 지방이 분리돼 중앙과 지방의 조정자로서의 황제권력의 존립기반 자체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이 가장 큰 명의 멸망원인이 됐다. 명의 멸망은 만주족 정권(청)의 중국지배를 불러들였고, 중국 역사의 내재적 발전 가능성을 고사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청대의 반동적인 통치 아래 중국역사의 ‘근대’로의 이행을 저해하였고 서양의 지배를 받게 하였던 것이다. 주원장의 황제독재체제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공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마이너스의 역사유산 또한 우리가 아직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커다란 부채로 남아있다. 개발과 성장의 이름 아래 계층간 격차와 지역간 차별이 발생하고 정당화되었던 바, 박정희 이후 우리 역사의 흐름의 기본적인 방향은, 차별과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야기되었고 우리를 혼란케 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의 독재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당대의 역사평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통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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