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은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삼대첩으로 꼽힌다. 그러나 북관대첩은 앞의 두 대첩에 비해서 대중적인 지명도가 많이 떨어진다. 그 까닭은 북관대첩의 주인공인 정문부 장군 개인의 불행과 관련이 있다. 정문부 장군의 전공을 다른 사람들이 가로채 그의 공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면과, 훗날 그가 모함으로 옥사한 사정도 겹쳐 그의 행적을 전하는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단편적 사료가 있을 뿐인데, 정문부 장군과 휘하 의병들의 전공을 기록한 북관대첩비가 있어 겨우 북관대첩의 사실을 알 수 있다.
북관대첩은 함경북도의 북단인 경성에서부터 함경도의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전장을 옮겨가며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이다. 싸움의 규모나 회수, 기일, 전투결과의 영향 등에서 앞의 두 대첩을 능가할 정도였으나 북관지방에 대한 지역차별, 정문부장군의 불행한 옥사 등이 겹쳐 당시 공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주민들의 한이 되었던 사건이다.
당시 이 지역에 침투한 일본군 사령관인 가또오 기요마사는 승리를 확신하고 이 지역에 대한 영구적인 지배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의 우세가 절대적인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의병이 일어났던 것이다. 함경도 땅은 여진족과 국경을 접하는 곳으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에도 그 지역사람들은 관리 임용 등에서 현저한 차별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언제나 조정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한편 여진족과 많은 접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싸우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하면서 공생관계를 유지했다. 지역적 특성 때문에 지역주민의 국가에 대한 귀속감이나 충성심은 다른 지역에 비해 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니 정문부장군의 신망과 리더십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
가또오 기요마사 군은 당시 일본군의 최강부대였으며, 가또오 기요마사는 지금도 일본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의 하나이다. 그러나 정문부장군의 의병부대는 외부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최강 가또오 부대와 처절한 전투를 치른 끝에 패퇴시켰으니, 그 장열함에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북관대첩비는 러일전쟁 당시 함경도 지방에 주둔하였던 일본군 사령관이 약탈해 갔다. 당시 대륙진출의 야욕을 품고 있던 일본에 있어서, 사상 최초로 대륙진출을 시도했던 임진왜란 당시의 최강 가또오 부대를 패퇴시켰던 기록인 북관대첩비가 러시아와 일전을 겨루는 현장에 존재함을 보고 도심을 일으켰던 것이라 본다. 이제 북관대첩비를 찾아오게 되어 정문부장군의 후손의 하나로서 남다른 감회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가또오 기요마사가 남긴 당시의 전투기록을 찾아서 북관대첩비의 내용과 비교 검토하면 보다 풍부한 사실을 발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이번 겨울방학에 일본으로 사료조사를 떠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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