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無邪(사무사)’의 敎訓(교훈)

  金文洙(김문수) 同門(동문) - 現代文學(현대문학)新人賞(신인상)(소설 부문에서 수상한 그는 ‘좀 더 부지런해지라는 채찍질로 상을 준 것 같다’며 겸손하게 웃는다. 서민들의 애환을 주로 다룬 創作集(창작집) ‘聖痕(성흔)’은 그의 61년 朝鮮日報(조선일보) 新春文藝(신춘문예) 당선작 ‘異端復興(이단부흥)’ 外(외)에 20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61년 문단에 데뷔한 그는 ‘聖痕(성흔)’ 이외에도 ‘蒸描(증묘)‧迷路學習(미로학습)’ 등 창작집이 있다. 金(김) 同門(동문)은 앞으로 文藝物(문예물)로 장편을 다루어 보고 싶다며 지금껏의 게으름을 떨쳐버려야겠단다.
  그는 이번 賞(상)을 받기까지 59년도의 自由新聞(자유신문) 新春文藝(신춘문예) 首席(수석)入選(입선)(作品(작품):외로운 사람), 67년 忠北(충북)文學賞(문학상)(作品(작품):半晌麗風記(반상려풍기)) 등을 수상했으며 本敎(본교) 國文科(국문과)를 卒業(졸업)하고 新聞(신문), 雜誌記者(잡지기자) 出版社(출판사)編輯長(편집장)을 역임, 현재는 正韓(정한)출판사 주간이다.

  ▲1939년 忠北(충북)淸州(청주) 出生(출생), ▲61년 文壇(문단) 데뷔(朝鮮日報(조선일보) 新春文藝(신춘문예) 당선), ▲62년 本校(본교) 國文科(국문과) 卒(졸) ▲現在(현재) 正韓(정한) 出版社(출판사) 주간


  고등학교 일학년 때, 힘이 센 놈에게 힘이 없다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억울하게 얻어터진 일이 있어, 나는 그 이튿날로 권투장갑을 끼는 만용을 부렸다. 그 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꼬박 반년동안을 그 체육관에서 맹연습을 했다. 그리고 링에 올라가서 컵을 타내야 하는 순서가 왔다. 시합을 며칠 앞둔 그날, 대전표(對戰表)를 봤더니 나는 베비급(級)이었다. 내가 베비급이 된 것은 물론 체중이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베비급이라니 그건 매우 창피한 노릇이었다. 더구나 나와 싸울 상대는 초등학교 6학년생이었다. 링 위에서 그 국민학생을 한 주먹에 때려눕힌다 해도 조금도 영광스러울 것이 없었다. 나는 그날부터 체육관에 나가지 않고 숨어 다녔다. 왜냐하면 그때 내가 컵을 타내야만 학교에 컵이 하나 더 늘기 때문에 상급생 권투 선수들이 나를 끝까지 링 위에 서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합이 끝나는 날까지 요리 조리 피해 다녔다. 그리고 그것이 권투를 계속하지 않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 후, 나는 미술부원이 되어 그림을 그리러 돌아다녔다. 화가가 되겠다는 꿈이 마냥 부풀어 있었다. 그 무렵 교지(校誌)에 투고한 콩트 비슷한 것이 상급생인 윤혁민(尹赫民‧放送劇(방송극)作家(작가))형의 눈에 띄었고 그로 인하여 자주 그 형과 어울려 다니게 되어 그림 쪽 보다는 글 쓰는 쪽을 택하게 되었는데 따지고 보면 아버지는 내가 그림 그립네 하고 다니는 걸 무척 싫어했던 것이어서 그런 힘도 컸다고 본다.
  어쨌든 지방 신문의 신춘문예에 가작도 하고 당선도 되곤 하여 소설을 돼보겠다는 내 결심은 더욱더 굳어졌고 그것이 내가 국문과를 지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당시 우리 국문과에는 최원(崔元), 박열아(朴烈我) 등 쟁쟁한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은 2학년 때 등단(登壇)을 해서 기성문인이 되었다. 나는 그들의 등단에 무척 초조해 있었다. 그것은 나도 빨리 문단에 등단해야겠다는 그런 초조였다. 하기야 대학 1학년 때 지금은 없어진 신문이지만 자유신문(自由新聞)의 신춘문예에 소설로 수석 입선을 한 경력은 있지만 그것으로 문단과 인연을 맺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험공부보다는 신춘문예 쪽에 주력을 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3학년 때인 196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내 소설이 뽑혔다.
  ‘小說部(소설부)當選(당선) 異端復興(이단부흥)…’ 지면(誌面)에서 이런 활자를 읽었을 때의 그 뿌듯한 감격, 지금 생각하면 정말 겁이 없던 때였다.
  그런데 이렇게 문단에 나오고 나서 한해, 두해가 지나자 겁이 났다. 좋은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학생 때 나는 문단 등단에만 신경을 쓰는 반면에 문학인으로서의 공부에 게으름을 떨어왔던 것이다.
  그 무렵 내 귀에 들어와 밝힌 공자의 얘기 하나가 있었다.
  사무사(思無邪)가 곧 그것이었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생각에 잡것이 들어있지 않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깨끗한 생각, 진실된 생각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문학은 글로 표현되는 예술이다. 글로 ‘생각’을 표현하는 예술인 것이다. 아무리 문장력이 좋더라도 이 ‘생각(思想(사상))’이 온전치 못하면 그 글에 빛이 나지를 않는다.
  기쁘지 않은 것을 억지로 기쁜 것처럼, 슬프지도 않은 것을 억지로 슬픈 것처럼, 옳지 못한 것을 억지로 옳은 것처럼 꾸며서 글로 쓴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글에는 공자가 말한 ‘思無邪(사무사)’의 ‘思(사)’가 없는 것이다. 생각에 잡것(거짓)이 들어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거짓이 들고 잡것이 들어 있는 글이 남에게 읽힐 것인가. 읽히지 않는 글을 쓰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도 없으리라. 설령 읽힌다 해도 그런 글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읽는 이의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글을 쓴다는 것도 불행 중의 불행일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쓸 때 공자의 이 ‘思無邪(사무사)’라는 말을 생각키로 했다. 과연 내 글이 읽는 이로 하여금 얼마치의 감동을 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글을 씁네, 문학을 합네 하는 입장에서 이 ‘思無邪(사무사)’란 말은 늘 염두에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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