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뮈 藷(저) ‘異邦人(이방인)’을 읽고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고 독신생활을 하는 하급사원 뫼르쏘에게는 다음과 같은 전보가 온다.
  ‘모친 별세, 명일 장례’ 그러나 그 순간 그에게는 어머니가 죽지 않은 것이나 별다름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장례식 전일 간호원은 뫼르쏘에게 ‘입관한 어머니가 왜 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는 ‘글쎄 잘 모르겠다.’는 말만을 했다.
  뜨거운 햇볕에 녹아서 아스팔트가 눅진하여 발이 빠져 들어가서는 번쩍거리는 바닥에 자국을 내어 놓는 것이다. 영구차 위로 들어나 보이는 마부의 가죽 모자는 마치 검은 영창 속에 넣어서 이긴 것 같았다.
  푸르고 흰 하늘과 그 단조로운 빛깔들, 끈적거리는 갈라진 아스팔트의 검은 빛깔, 거무스름한 의복 빛깔 옻칠한 영구차의 까만 빛깔들 사이에서 나는 흐리멍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햇빛, 가죽 냄새, 영구차의 말똥 냄새, 옻 냄새, 향냄새, 잠 못 이룬 하룻밤의 피로 그러한 모든 것이 나의 눈과 머리를 어지럽게 만든 것이었다. 이것은 뫼르쏘 어머니 장례식 날 뫼르쏘의 느낌을 묘사한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졸고 있는 그의 意識(의식)의 한 장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보다 햇빛과 옻냄새 등에 대한 어지러움을 느끼는 뫼르쏘 그는 곧 자기가 처해있는 世界(세계)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무관심 속에서 뫼르쏘의 환상은 전개되는 것이다.
  ‘나는 창문을 닫고 방안으로 돌아오며 거울 속의 알코올램프와 빵조각이 놓여있는 테이블 한 쪽이 비쳐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나에겐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나고 그러니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는 다음날 뫼르쏘가 창 너머 한길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무의미하고 판에 박은 듯한 동작을 온종일 바라보며 하던 말이었다. 여기에서 뫼르쏘의 의식은 아직도 本能(본능)에 가까운 감각에 불과하다. 앞에서 말한 어머니의 죽음도 그의 졸고 있는 의식을 흔들어 깨우지 못했음을 본다.
  그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희망도 없고, 물론 神(신)도 없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좋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뫼르쏘의 여자관계에 대한 태도이다. 위와 같은 마리의 고백도 역시 그의 졸고 있는 의식을 흔들지 못했다. 이러한 면에서 ‘異邦人(이방인)’이란 감정은 고독의 상징이며 부조리의 인식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여인마저도 이방인으로 보이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친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자기와 친구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였더니 그는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이것은 뫼르쏘가 같은 계단에 살고 있는 창고 책임자라는 레이몽과 우연한 친구 관계를 맺게 되는 부분이다. 결국 레이몽과 함께 레이몽의 친구의 별장으로 해수욕을 즐기러 떠나게 된다. 뫼르쏘는 어떤 돌발적인 계기로 즉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리어져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제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눈 앞으로 닥쳐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모든 것이 동요한 것은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왔다. 하늘은 활짝 열리며 불을 쏟는 듯하였다.
  나의 온몸이 긴장하여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놀랐고 나는 권총자루의 미끈한 배를 만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도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라는 이유로 아무런 自意的(자의적) 의도 없이 그는 단지 레이몽과 관계가 있을 수 있는 아랍인을 殺人(살인)한다. 이 부분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다. 사형 선고를 받고 비로소 뫼르쏘의 졸고 있던 의식이 가장 심각한 상황- 죽음에 직면한 -속에서 깨어나 몸부림친다는 것이 바로 異邦人(이방인)의 총괄적인 줄거리이다. 그리하여 뫼르쏘는 사형일자만을 기다리며 감옥 속에서 일종의 행복감마저 느낀다.
  왜냐하면 그것은 졸고 있던 의식에서 벗어나 완전히 깨어있는 의식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환상과 선입견과 미신을 앗아가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그만 권태에 사로잡혔던 뫼르쏘‧자기를 위해서 마련되어 있지 않은 듯이 보이는 이 세계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인간을 까뮈는 그렸던 것이다. 인생은 우리가 호응하는 데로 해준다는 헛된 망상을 씻어주려는 의도를 기획된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 이방인은 이러한 배리와 오해를 느끼고 다만 인간은 그 무엇도 자기를 도와주거나 부축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필연코 알게 해준다.
  이리하여 支離滅裂(지리멸렬)할 뿐이고 理性(이성)이 극복할 수 없는 不條理(부조리)한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이 존재는 일체의 모든 行動能力(행동능력)을 상실한다고 하는 것이다.
  ‘발냄새, 흙냄새, 소금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주었다. 잠든 여름의 희한한 평화가 조수처럼 내 속에 흘러들었다. 그 때 한밤의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 영원히 관계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 참으로의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만년에 왜 어머니가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생애를 다시 꾸며 놀음을 하였는지…모든 것을 다시 볼 마음이 생긴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다름없고 형제 같음을 느끼며 나는 행복스러웠고 지금도 행복스럽다고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비극적 휴머니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뫼르쏘는 그의 역할을 썩 잘해 낸 것이었다.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이것은 현실에의 適應(적응) 不能者(불능자)인 뫼르쏘의 철저한 환멸과 세계에의 무관심을 환기시켜준다. 異邦人(이방인)은 부조리에 반항해서 쓰인 고전작품이며 질서 정연한 작품이다.
  이 건조 청결한 작품, 언뜻 보기에 무질서한 듯이 보이면서도 실로 짜임새 있는 글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人間的(인간적)>인 바로 이것에 열쇠가 있는 것으로 보게 된다. 다음은 사르트르의 말이다. <異邦人(이방인)은 결국 자기에 대한 자기를 말하며 情神(정신)에 대한 자연의 인간을 가리킨다. 異邦人(이방인) 즉 부조리의 인간은 반역 가운데 자기를 긍정한다.
  그럼에 따라 그는 열렬한 주의력을 갖고 죽음을 응시한다.> 이 作品(작품)의 정통적인 핵심을 바로 찔렀다. 바로 異邦人(이방인)의 독후감은 부조리와 의식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우리는 습관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쳇바퀴를 돌 듯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다.
  人生(인생)에 뜻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문제 삼지 않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처럼 졸고 있는 意識(의식)은 實存(실존)을 느끼는 인간의 意識(의식)일 수가 없다. 意識(의식)이 完全(완전)히 깨어나서 명확하게 不條理(부조리)를 認識(인식)할 때 비로소 人間(인간)은 實存(실존)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까뮈는 부조리의 해결을 꾀하지는 않고 不條理(부조리)에 반항함으로써 가치를 창조하여 그것을 초극하려한다. 즉 해결될 희망이 없는 부조리에 반항할 수 있는 힘은 인간의 생명이며 부조리의 초극을 준비하는 가치를 낳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의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高貴(고귀)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그는 믿었던 것이며 不條理(부조리)와 대결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異邦人(이방인) 속에서 졸고 있는 意識(의식)을 나타냈고 결국은 깨어난 의식과 不條理(부조리)를 써 내려 갈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스스로 자신의 意識(의식)狀態(상태)를 추적하여야 하고 그 가운데 느끼는 不條理(부조리)에 대한 反抗的(반항적) 무기, 즉 生命(생명)意識(의식)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은 인간의 尊嚴性(존엄성)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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