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不退(불퇴)의 精進(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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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란 누구나 그 나름의 어떤 理想(이상)이나 또는 목표를 향해서 살아가는 存在(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에는 民族(민족)이나 性別(성별) 또는 年齡(연령)을 가릴 것도 없고 또한 빈부와 지위의 高下(고하)가 문제가 안 된다. 다만 差異(차이)가 있다면 설정한 이상이나 目標(목표)가 다를 뿐이고 그 理想(이상)이나 目標(목표)를 향해서 얼마만큼의 情熱(정열)을 쏟는가하는 노력의 정도에 差(차)가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죽기 전에 그 이상을 성취했고, 目標(목표)에 도달했느냐 못했느냐에 따라서 그가 一生(일생)을 뜻있고 값있게 살았느냐 또는 그렇지 못했느냐하는 評價(평가)를 받게 마련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들 인간에게 있어서는 設定(설정)하는 이상이나 目標(목표)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경주하는 노력의 여하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리 훌륭한 理想(이상), 좋은 목표일지라도 그러한 이상과 목표를 향해 노력을 하지 않거나 또는 적게 노력한다면 도저히 그러한 이상을 성취하거나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부터 많은 聖賢(성현)들이 이에 대해 言及(언급)을 한 것을 알고 있는데 ‘精進(정진)’이란 바로 이러한 努力(노력)이란 말의 佛敎的(불교적)인 表現(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精進(정진)이란 말 속에는 우리가 흔히 쓰는 努力(노력)이란 뜻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努力(노력), 즉 힘쓴다는 말을 중심으로 하여 몇 가지의 것들을 複合的(복합적)으로 內包(내포)하고 있어서 단순히 정진 즉 努力(노력)이라고만 할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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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敎(불교)에서는 大乘菩薩(대승보살)이 生死(생사)의 苦海(고해)를 건너 理想境(이상경)인 니르바나의 저 언덕에 이르는 여섯 가지의 德目(덕목)을 六(육)파라미타라고 한다. 六(육)파라미타란 布施(보시), 持戒(지계), 忍辱(인욕), 精進(정진), 禪定(선정), 智慧(지혜)의 여섯 가지인데, 결국 이러한 여섯 가지의 德目(덕목)을 실천하여야 니르바나의 理想境(이상경)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말을 바꾸면 이러한 六(육)파라미타를 실천하는 사람을 大乘佛敎(대승불교)에서는 理想的(이상적)인 人間像(인간상)인 菩薩(보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을 바꾸면 佛敎(불교)에서는 우리들 人間(인간)이 行(행)하여야 할 가장 훌륭한 德目(덕목) 여섯 가지 중의 하나로 精進(정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精進(정진)은 어떤 뜻을 內包(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雜寶藏經(잡보장경)’ 卷(권)二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히말라야 山脈(산맥)의 한 쪽에 大竹林(대죽림)이 있었다. 그 竹林(죽림)에는 수많은 鳥獸(조수)들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바람이 불어 대나무들이 서로 마찰되는 바람에 불이 나서 竹林(죽림)을 태우게 되었다.
  그 때 한 마리의 앵무새가 있어 숲속의 뭇 짐승들이 불에 타죽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크게 慈悲(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 물 있는 곳으로 날아가 날개에 물을 묻히고는 다시 불에 타고 있는 숲으로 날아와서 물방울을 떨어트리곤 다시 그렇게 하기를 쉴 새 없이 계속하고 있었다. 그 앵무새의 마음이 너무도 갸륵하고 쉴 새 없이 情熱(정열)하였기 때문에 帝釋官(제석관)이 이에 감동하여 크게 흔들렸다고 한다. 帝釋天王(제석천왕)이 ‘어찌하여 내 天官(천관)이 움직였는가?’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世間(세간)을 내려다보니, 한 마리의 앵무새가 불을 끄려고 死力(사력)을 다하고 있지만 불을 끄지 못하고 있었다. 帝釋天王(제석천왕)이 앵무새에게로 가서 그 어리석음을 말하자 앵무새는 ‘내 마음은 넓습니다. 精懃(정근)하여 게으르지 않는다면 반드시 불을 끌 수가 있다고 봅니다. 만약 이 몸이 다해서도 끄지 못한다면 다시 來世(내세)에 몸을 받고 맹세컨대 반드시 불을 끄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帝釋天王(제석천왕)은 그 뜻과 마음씨에 감동하여 큰 비를 내리게 하여 불을 끄게 하였다.
  우리는 이 佛典(불전) 說話(설화)에서 불을 끄려는 앵무새의 정진이 첫째 慈悲心(자비심)을 갖고, 둘째 마음씨가 넓으며, 셋째 精曠(정광)하여 게으르지 않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同經(동경) 卷(권)八(팔)에 보면 다음과 같은 說話(설화)가 있다.
  옛날 카시國(국)과 비데하國(국)의 중간에 大曠野(대광야)가 있었는데 샤트루란 惡鬼(악귀)가 있어 도로를 단절하여 아무도 그리로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師子(사자)라고 이름 하는 商主(상주)가 5백 명의 상인을 이끌고 그리로 지나갈려 하자 商人(상인)들은 모두 겁을 먹고 그리로 가서는 안 된다고 야단들이었다. 商主(상주)는 ‘겁먹을 것 없다. 그저 내 뒤만 따라오라’고 하고 앞장서서 광야로 나아가 惡鬼(악귀)앞에 이르렀다. 惡鬼(악귀)는 ‘너 아직 내 이름을 듣지 못하였는가?’하고 묻자 商主(상주)는 ‘너의 말을 들었지만 한 번 싸워보고자 왔노라’고 대답하였다. 惡鬼(악귀)는 ‘그러면 얼마든지 덤벼봐라’하고 버티어 섰다. 이때 商主(상주)와 5백 명의 商人(상인)들이 일제히 활을 쏘자 그 화살들은 전부 귀신의 배속에 들어가 사라져버렸고 귀신은 끄덕도 없었다. 칼을 휘둘러 베자 이번에는 그 칼들도 귀신의 배속에 들어가 사라져 버렸고 주먹으로 치자 주먹도 들어가 버리고, 바른 발로 걸어 차자 배에 붙어버리고 왼 발로 차도 배에 붙어버리고 머리로 받자 머리마저 귀신의 배에 붙어 버렸다. 이 때 귀신은 偈(게)를 지어 말하기를 ‘네 손·발·머리 또는 다른 어떤 것으로 나를 공격하더라도 소용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商主(상주)는 偈(게)를 說(설)해 대답하기를 ‘내 지금 활, 칼, 손, 발 머리 전부 너한테 붙어 버렸지만 精進(정진)만은 네 몸에 붙지 않았다.  
  精進(정진)하여 쉼이 없다면 너와 투쟁하여 결코 지지 않는다. 내 이제 끝까지 너에게 겁을 먹지 않고 쉬지 않고 精進(정진)하련다’고 하였다. 그러자 惡鬼(악귀)는 ‘네 마음씨가 그와 같다면 내가 질 수밖에 없다. 5백 명의 商人(상인)들을 놔주겠으니 어서 가시오.’라 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이 說話(설화)에서 첫째 쉬지 않고 둘째 겁을 먹지 않는 商主(상주)의 精進心(정진심)을 볼 수가 있다.
  또한 ‘孛經抄(패경초)’에 보면 ‘사람이 무엇인가 하고자 할 때에는 마치 우물을 파듯이 해야 되나니 우물을 파다가 중지하지 않아야 우물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라 하여 精進(정진)에는 中斷(중단)이란 있을 수 없고, 또 ‘遺敎經(유교경)’에 보면 ‘마땅히 쉬지 않고 精進(정진)하라. 비유컨대 小水(소수)일지라도 항상 흐르면 능히 돌을 깎을 수 있는 것이니라. 만약 行者(행자)의 마음이 가끔 懈怠(해태)해지면 돌을 비벼 불을 얻으려 할 때 돌이 달아 뜨거워지기 전에 쉬는 것과 같은 것이니 그러면 아무리 불을 얻으려고 하여도 도저히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니라.’ 하여 精進(정진)에는 懈怠(해태)가 禁物(금물)임을 잘 例說(예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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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을 간추려 보면 우리는 努力(노력)이란 말의 佛敎的(불교적) 表現(표현)인 精進(정진)은 慈悲(자비)로운 마음과 넓은 度量(도량)으로 자기가 目標(목표)로 하는 바를 향하여 쉬지 않고 꾸준히 힘쓰되 중단하거나 게으르지 말며 공포심도 갖지 말라는 複合的(복합적)인 어휘임을 알 수가 있다. 가끔 우리는 精進(정진)이란 말과 함께 勇猛精進(용맹정진)이란 말도 쓰는데, 精進(정진)이란 말 속에 이미 勇猛(용맹)의 뜻이 內包(내포)되고 있어서 엄밀히 말한다면 精進(정진) 곧 勇猛精進(용맹정진)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본래 精進(정진)은 大乘菩薩(대승보살)이 行(행)하는 六(육)파라미타의 하나이지만 大乘菩薩(대승보살)이란 곧 다름 아닌 理想的(이상적)인 人間像(인간상)이므로 우리 人間(인간)들이 行(행)해야 할 가장 훌륭한 德目(덕목)의 하나가 精進(정진)임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새겨 자기가 設定(설정)한 理念(이념)과 目標(목표)를 향해 精進(정진) 또 精進(정진)함으로써 人生(인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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