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詩創作(시창작)을

  “詩(시)가 비로소 어렵다고 느껴질 때 賞(상)을 받았다.”고 現代文學社(현대문학사)가 제정한 제21회 新人賞(신인상) 詩部(시부) 수상자인 文貞姬(문정희) 同門(동문)은 소감을 말한다. 69년 本校(본교) 國文科(국문과) 재학시절에 ‘月刊文學(월간문학)’ 新人賞(신인상)을 수상(作品(작품) ‘불면’)하여 文壇(문단)에 데뷔한 文(문) 同門(동문)은 금년 29세의 연소 여류 詩人(시인).
  詩(시)는 항상 밤늦게 쓰며 진명여고 시절부터 本校(본교)를 비롯한 名大學(명대학) 白日場(백일장)에서 30여회의 詩部(시부) 당선을 해 賞福(상복)이 많은 편. 文(문) 同門(동문)은 ‘그러나 쉽게, 편하게, 상식적으로만 살지는 않겠다’며 비장한 각오로 詩人(시인)으로서의 자세를 굳혔다.
  最近(최근) 詩劇(시극)에 매력을 느껴 지난 74년에 발표한 詩劇(시극) ‘나비의 탄생’을 비롯 詩(시)로서는 못 다한 얘기를 詩劇(시극)이라는 그릇을 빌어 담았다. 現代文學(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작품은 ‘새떼’로 1, 2, 3部(부)로 나누어 지난 2년간 쓴 詩(시), 詩劇(시극), 댓닢詞(사) 등 30여 편을 싣고 있다.
▲1947年(년) 5月(월) 25日生(일생)
▲1969년 月刊文學(월간문학) 신인상 수상(文壇(문단) 데뷔)
▲70년 本校(본교) 國文科(국문과) 卒業(졸업)
▲現在(현재) 명성여고 교사

  女高時節(여고시절) R․M 릴케를 읽다가 나는 갑자기 고민에 휩싸여 버렸다.
  릴케는 文學(문학)을 지망하는 청년에게 주는 편지에서 대저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밤과 밤의 가장 중요한 시간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죽어도 못 배길 필연의 욕구가 네게 있다면 너는 이 운명에 인생을 던져도 좋다>
  나는 밤과 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았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가? 죽어도 못 배길 필연의 욕구가 내게도 있는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결국 릴케의 말대로 한다면 文學(문학)을 할 기본 자격이 없다는 결론이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이 분명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삶의 형태가 있는데 그 중에서 詩(시)를 쓰면서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치를 하는 것보다 상업을 하는 것보다 돈을 많이 가진 부자보다 나는 詩(시)를 쓰면서 살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때보다도 詩(시)를 쓰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였다.
  나는 당연히 이런 생각에 나의 生(생)을 던지고 말았다.
  내가 처음 글을 쓰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 할아버지>라는 전국 어린이 글 모집에서 당선의 영예를 차지한 것을 필두로 하여 여러 차례나 <신문에 난 어린이>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나의 文學(문학)과 賞福(상복)은 進明女高時節(진명여고시절)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梨花女大(이화여대), 성균관大(대)를 비롯한 전국의 白日場(백일장)에서 무려 30회의 壯元(장원)을 차지함으로써 나는 일약 天才文學少女(천재문학소녀)(?)가 돼버렸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식의 文學(문학) 수업이 얼마나 부끄럽고, 부실한 것인가 씁쓰레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런 빛나는(?) 女高時節(여고시절)의 유명세는 나의 콧대를 상당히 높여 주는데 기여했었다.
  나는 잘 울고 잘 웃고 그리고 고민하는 少女(소녀)로서 女高生(여고생)으로서는 최초의 詩集(시집)이라는 <꽃숨>을 高(고)3때 상재하였다.
  未堂(미당) 선생님의 서문으로 나온 이 詩集(시집)은 7백부 한정판에 완전 매진, 아울러 숱한 팬레터까지 쇄도하는 바람에 나는 건방져졌고, 좋은 의미에서 자존심이 강해졌다.
  모교 進明(진명)에서는 영예의 최고 금메달을 나의 목에 걸어주었다.
  東大(동대) 신문사 주최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던 인연으로 나는 東大(동대) 國文科(국문과)에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도움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詩(시) 쓰는 것만은 자신이 있었던 나는, 그러나 최초로, 文學(문학)이란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큰 것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좌절하기 시작했다.
  나는 비로소 열리지 않는 진짜 벽을 두들겼으며, 방황했으며 할 수 없이 연애하기 시작했다.
  공부는 엉터리로 하고, 입술 바르고 데이트만 했다. 나는 詩(시)를 잘 쓰지 못하는 부채감 때문에 젊음 때문에, 높은 남산의 캠퍼스를 불행한 다리로 오르내렸다. 강의는 많이 빠지면서 공부 잘한 척 했고 남학생들을 우습게 쳐다봤으며, 공동묘지나 구경 가자고 작당했으며, 막걸리도 가끔 마시고 치기를 부렸다.
  데모로 학교가 뿌연 먼지 속에 싸여 있을 때 나는 드디어 月刊文學(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大學(대학) 4學年(학년) 봄이었다. 오만하던 나는 처음으로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했다. 그리고 상당히 겸손해졌다.
  그리고 오늘까지 7년 동안 나는 참으로 바쁘게 人生(인생)을 살아버렸다. 직장을 두 번 옮겼으며 시집을 갔으며 아이를 둘 낳았으며, 詩集(시집)을 두 권 발간했으며, 詩劇(시극)을 발표 공연했으며, 文人劇(문인극)의 여배우가 되어 연극한답시고 아우성쳤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눈이 핑핑 돌게 뛰어다녔다.
  이번에 문단 데뷔 7년 반밖에 되지 않는 나에게 <現代文學(현대문학) 新人賞(신인상)>이 주어진 것은 잘했다고 주는 賞(상)이라기보다는 부지런히 했다고 주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詩人(시인)은, 神(신)과 민족 사이에서 存在(존재)를 發音(발음)하는 사람이라고 어느 철인은 말했던 것 같다.
  좋은 시인이 되겠다. 쉽게 살지 않겠다. 생명이 끝날 때까지 나는 온몸으로 살겠다. 적당히 살지 않고 진짜로 살다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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