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가 시인이기도 했다면 미당은 오직 시인”

<연 재 순 서>

  1. ‘님의 침묵’의  한용운
  2. 질마재 신화의 서정주
  3. ‘승무’의 동탁 조지훈
  4. 목가적 서정시인 신석정
  5. ‘낙화’의 신화 이형기
  6. ‘농무’의 신경림
  7. ‘태백산맥’의 조정래

미당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한 기자는 '시(詩)의 정부(政府)가 스러졌다'며 애도사를 썼다. 한국 현대 시의 벼락같은 축복이라는 수사가 과장이 아니었던 한국 현대 서정시의 거장. 우리대학의 소중한 보물이자 모든 한국어 사용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마음의 문화재’ 미당,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도서관에 아로새긴 동국 정신의 꽃

중앙도서관 로비에서 잠시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라. 학생카드를 꺼내 출입하는 그 자리 위에 ‘동국 정신의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자주 드나들어도 세심하게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꽃은 무슨…”이라고 묻는다면 ‘낚이는’ 거다. 평편하고 기다란 그리스 대리석에 제법 긴 시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누구든지 이 시를 백 번 읽으면 진짜 ‘동국인’이 된다. 1968년 개교 62주년 <동대신문> 기념호에 발표된 미당 서정주의 모교 찬시다. 40년이 훌쩍 넘었다. 지금 읊어도 가슴 울렁거리고 기상이 뻗쳐오른다. 세상의 모든 모교 찬양시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우리 고향중의 고향이여’라는 작품이다.

100주년을 맞아 교정에 세운 세 기념시비 가운데 하나다. 2006년 봄, 명진관 뜨락에 조지훈 시비, 혜화문 밖 공원에 신경림 시비가 함께 건립되었다. 기왕에 세워진 본관 북쪽의 한용운 시비까지 합쳐, 교정엔 동국문학 100년을 대표하는 시비가 네 군데 서게 되었다.

미당 시비는 특이하게도 도서관 ‘현관’ 위에 ‘걸려’ 있다. 그의 시는 대학의 핵심 엔진인 도서관에 왜 걸려 있게 된 걸까? 미당은 세계의 ‘가장 후미진 서재’에서 ‘최후의 생각’과 ‘최후의 책임’을 노래했다. 학점과 취업 걱정 때문에 도서관에 드나드는 이즈음의 학생들에겐 고상한 형이상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후의 생각’과 ‘최후의 책임’은 결국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이고, 불교의 ‘상구보리 하화중생’(위로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 세상을 위한다)의 현대적 번역이다. 이 ‘공중문패’야말로 보편적 가치이며 동시에 동국대학교 특유의 정체성인 것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나오는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는’ 그것! ‘동국 정신의 꽃’이라 자랑스럽게 불러도 좋다. 공중에 높이 달린 우리의 문패. ‘우리 고향중의 고향이여’라고 노래하는 동국 정신의 꽃을 바라보는 일은 오직 우리 대학만의 행복이다.  

이 시간 이후, 이 시를 읽고 외우고 피 속에 뼛속에 저장하여 완전하게 자기화하면 우리는 누구나 씩씩하고 지혜로운 동국인이 된다. 몰랐던 걸 새로 알게 되고 오래 묵은 시간의 인연이 막강한 힘으로 우리를 돌보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도전정신에 가슴이 불끈거린다. 혈관 속에서 힘이 툭투툭 불거져 나오는 걸 느낀다. 시 한 편이 내 안에서 새롭게 살아,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入處皆眞), ‘어디에 있던 내 인생의 주인은 나 자신’이란 걸 깨우치게 된다. 경제, 국방 등의 하드파워보다 문화라는 소프트파워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를 실감할 수 있다. 서정주는 자신의 모교와 후배들에게 이런 마음을 선물한 우리 선배다. 

미당 서정주와 동국대학교

미당 서정주(1915~2000)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출신이다. 1935년에 입학했으니 35학번이다. 전 학년 수학은 하지 못했고 1년만 겨우 다녔다. 일제 강점기에, 많이 방황한 까닭이다.

광주학생운동지지 데모하다가 중앙고보(현 중앙 중고등학교) 2학년 때 퇴학당했다. 전라도 고창에서 유학 온 중학 2학년짜리가 반일운동으로 퇴학당했으니 제대로 학업을 이어가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 소년을 데려다 후원해 준 인물이 당대 조선 최고의 석학인 석전 박한영 스님이다. 석전 스님은 지금으로 말하면 불교계의 제일 큰 어른이신 종정스님인 동시에 대학 총장이기도 한 분이다. 총장의 특별한 아낌 덕에 입학은 했으나 무엇으로도 잘 다스려지지 않는 청년의 서러움은 스스로를 중퇴생으로 만들고 만다.

그러나 이 1년의 시간은 그에게 크낙한 운명을 만들어준다. 1960년, 동국대학교 교수가 되어 다시 동국대학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사실은 이 학연 때문이다.

미당은 전문학교 중퇴 학력이었지만, ‘화사집’(1941), ‘귀촉도’(1948), ‘서정주시선’(1956)을 발간해 이미 최고 시인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이 나라의 천재시인은 갓 서른에 대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러 대학에 강의를 다녔지만 정식 교수 발령은 그의 모교에서 가능했다.

미당이 동국대학교 교수로 봉직하는 동안 그는 명실상부한 한국 현대시문학의 ‘아버지’였다. 그는 종신토록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시인이었으며, 대표작이 제일 많은 시인이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다섯 번이나 추천된 우리나라 최초의 문인이었다.

필자가 학교 다닐 때, 미당의 별명은 ‘걸어다니는 문학사전’이었다. 그의 강의는 풍성하고 경이로운 ‘문인 교류담’일 때가 많았다. 이상, 김영랑, 오장환 등 우리가 문학사 시간에 배우는 숱한 문인들 이야기가 줄줄이 나왔다.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동국의 자랑이었고 신화였다.

서정주, 한국문학의 최정상

서정주는 동국문학의 울타리로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20세기 한국문학의 최정상이다. 대표작 몇 편으로 그를 공부하는 풍토가 안타깝다.

그는 시를 쓴 기간만 70년이다. 15권의 시집, 1천 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5천년 한국 역사에 대한 애정, 민족 정체성과 겨레어의 아름다움 발견, 작품 한편 한편의 미학적 완성도, 만족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예술가 정신, 이 모든 분야에서 서정주와 비교할 만한 시인은 없다.

한용운이 이도득시(以道得詩, 도를 깨달은 이후에 시로 그 경지를 표현하다)했다면, 서정주는 이시득도(以詩得道, 시를 공교롭게 잘 써서 마침내 도의 경지에 이르다)의 경우다. 만해가 ‘시인이기도’ 했다면, 서정주는 ‘오직 시인’인 것이다.

김소월은 뛰어난 국민시인이었으나, 언제나 ‘서럽고 젊은’ 시인일 뿐이었다. 인생의 간난신고와 우여곡절을 ‘시의 한 생애’로서 파란만장하게 보여주는 서정주와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에서, 윤동주, 정지용, 김수영도 아쉽다.

인생과 자연과 우주에 대한 생각의 폭과 깊이에서, 서정주가 걸어간 길을 비슷하게라도 보여준 시인은 없다. 그가 명실상부하게 한국문학의 최정상이다. 믿기 어려우면, 그를 읽어 보라. 그는 우리 동국대학의 소중한 보물인 동시에 모든 한국어 사용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마음의 문화재’이다.

중앙도서관 지하 맨 아래층 인문과학실에 그의 유품이 소장된 방이 있다. ‘미당문고’다. 2000년 작고 이후에, 자택에 있던 소중한 유품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육필 노트를 비롯한 유품 1만 점이 그 스스로가 모교를 위해 노래한 시 구절 속 ‘영원 속의 가장 후미진 서재’에서 동국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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